가침박달꽃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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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침박달꽃의 사랑
  • 육정숙
  • 승인 2004.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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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을 그리움 하나 있다면 비바람 불어와 흔들리는 삶일지라도 행복할 수 있으리. 산 넘고 바다건너 불어오던 오월의 바람은 화장사 도량에 그윽한 꽃향기로 머물렀다.

아무리 거칠고 모진 사람이어도 불전에 향 살라 백팔번뇌百八煩惱, 업장소멸業障消滅 원하여 빌고 또 빌어 모두다 부처마음이요, 화장사 도량 둘러, 보이는 곳마다 극락정토니 이름 모를 풀꽃마저도 성스럽게 보인다.

가침박달 나무 환희심幻戱心은 바람 불어 흔들릴 때마다 하얀 미소를 빛처럼 쏟아내고 꽃향기는 화장사 넓은 도량을 그득 채워갔다. 언뜻 보기엔 수수해 보여 여염집 정원에 피어있어도 어울릴 것 같고 산비탈 박토에서도 봄직한 나무 같아 오히려 친근감이 있다. 그러나 다음 해 꽃을 피울 때까지 열매가 떨어지지 않는다 하니 그 사랑의 깊이를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어찌 가늠하리. 꽃잎 하나 보듬고 싶어도 미련한 중생인지라 먼발치서 바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 가침박달꽃.
청주 동물원 옆에 화장사가 있는데 그곳에 가시면 가침박달을 보실 수 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이 나지만 가침박달 나무는 꽃과 잎이 동시에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었다가 다음 해 꽃을 보아야 그 열매가 떨어진다는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화장사 무진스님께서 가침박달은 꽃과 잎과 열매를 동시에 볼 수 있어. 만남과 이별이 없고, 생성과 소멸이 없고, 피고 짐도, 가고 옴도 없는 하나, 그것은 항상 머물러 있는 법法의 세계이니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어 지는 꽃을 따라 아쉬움도, 미련도, 애태움도 없는 것이라 하셨다. 세상 만물이 생자필멸生者必滅 이라 하지만 불교의 근본 원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만법萬法은 마음 안에 존재 하니 그래서 가침박달 꽃을 ‘깨침꽃’이라 이름 지으셨다고 한다.

카메라 사각 눈을 통해 가침박달 꽃의 자태를 훔치다가 노老교수는 젊은 여승의 미소를 보았다네. 마음을 하얀 꽃잎에 묻어 두고 노교수는 소년이 되었다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소년은 푸른 잎 속에 숨어 하얀 꽃잎이 되었고 열매가 되어 화장사 도량에 머물렀다. 어느 세월 속에 머물러 정좌하고 계시던 老교수의 입가에 가침박달 꽃봉오리의 미소가 살며시 번졌다.

봄비 내리는 밤! 뒤척이며 잠 못 들던 노老교수의 그윽한 눈가에 이슬로 내리는 그리움 좇아 피어난 여승의 미소는 밤새 빗소리로 흘러 넓고 깊은 화엄華嚴 바다를 항해 하고 있다. 시작이며 동시에 끝인 그 하얀 미소의 법열을 노교수는 이미 깨달았었나보다.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하나요, 마음속에 있으니,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하얀 미소를 그리는 노교수의 가슴으로 출렁이는 바다가. 파란 하늘이 열린다.

푸른 잎에 몸을 숨기고 하얀 꽃잎에 마음을 묻어두었다는 사랑! 그 사랑은 남여간의 사랑이 아닌, 같이 있어 느끼는 숨결 같은 사랑, 모든 살아 있어 제 자리를 생각하듯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마음이다.

노교수는 그 하얀 미소의 그리움을 좇아 마음은 늘 화장사를 향한다. 연서 없는 사랑, 연연하여 가슴에 묻은 사랑, 깊은 산속에 샘물처럼 고여 오는 맑은 사랑, 법해法海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사랑! 억겁의 인연으로 만난 하얀 꽃잎의 미소는 여승의 입가에 머물고, 풍경소리는 온 생명체의 페부속 깊이 스며들어 끝없는 구도의 울림으로 머문다.

뎅그렁 뎅~

 

육정숙 님은 푸른솔 문학회원이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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