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유교를 재발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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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 유교를 재발견 하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3.06.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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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속살을 보여주는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김주란
청주시립도서관 사서

올 해 들어 청주시립남부도서관에는 매주 목요일 독서토론 모임이 열린다. 주제독서회 ‘함께읽는역사반’, ‘함께읽는철학반’이 격 주로 열리기 때문인데, 이들 회원들은 미리 선정되어있는 지정도서의 완독을 위한 1년 간의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 독서회는 적극적인 독서인을 양성하기위한 방책으로, 인문학적 책읽기가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사서로서의 믿음이 있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다.

지난 주 철학반 지정도서였던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배병삼 저)를 소개한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기도 했지만, 철학반 회원들의 반응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공감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다. 더불어 같은 저자의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라는 책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내가 받은 유교의 재발견이라는 큰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근대이후 역사는 서양의 동양정복과 다름 아니다. 조선이 망하고 유교의 이마에는 망국의 사상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고 미개하고 낡은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는 양옥집에서 살고, 양장을 입으며 학교에서는 서양학문을 주로 배우고,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은 금기시하여왔다. 하지만 저자 배병삼은 말한다. 작금의 세태와 생활은 진정 그전보다 나은 것인가?

자본주의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 땅은 부정의와 불평등과 과로로 몹시 피로하다. 농업은 궤멸된 지 오랜 터, 노동자들은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에서 목을 매고, 청소년들은 늦은 봄 꽃잎처럼 제 몸을 마구 내던지고 있다. 가정은 쪼개지고 폭력으로 얼룩진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는 대립하고 있다.

잘사는 사람들은 배불러 죽을 판, 못사는 사람들은 목숨을 연명하기도 힘든 판. 길어진 노년은 천대받다 고독사하고, 세상은 휘황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외롭고, 불안하다 말한다. 어디서부턴가 금이 가고 있는 현대, 자연스럽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진정 철학의 시대가 되돌아오고 있다고 저자는 외치고 있다.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라는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유교, 그 후 천하를 경영했고 동양의 많은 나라들은 유교국가라 명명되었지만 공자님 맹자님의 진의는 위정자들의 지배논리로 수없이 왜곡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는 일본에서 역수입되어 식민지배의 배경으로 둔갑한 것이라 한다. 충효, 민본, 삼강오륜, 위민 등등 평소 유교를 설명해온 개념들에는 얼토당토 않은 오해가 덧씌어진 것들이 많다. 저자 배병삼은 한 편의 정연한 논문을 엮듯 유교에 덧씌워진 누더기를 면밀히 분석하고, 하나하나 벗겨내 비로소 뽀얀 유교의 속살을 보여준다.

충(忠)은 자아성찰적 개념

그 중 우리가 ‘충효=유교’로 공식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밝히는 대목은 나로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국가가 충효를 이용하면 매우 천박하고 질 낮은 사회가 된다. 독재 권력은 국가를 사유화하면서 국민들에게 충과 효를 강조하며 권력에 의심을 품거나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활용한다. 또한 ‘효도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서 군주(국가)에게 충성하라.’는 논조가 실상 <논어>에는 단 한 곳도 없다.

유교에서 말하는 충(忠)은 각각 맡은 제 소임을 다하는, 자아성찰적 개념이다. 군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누구든(임금조차도, 아니 임금부터) 제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충실성, 성실성을 뜻한다.(본문 68쪽) 도리어 ‘충효’라는 묶음말은 법가사상인 한비자에 처음 등장해 한나라 초기 제국의 통치 원리로 받아들여졌다가 특히 일본의 에도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적 토양에서 충효는 멸사봉공, 대의멸친, 상명하복 등의 무시무시한 일본식 가치관와 군국주의적 언어로 분화되어, 40년 간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이것들이 마치 우리 전통인양 행세해 왔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그동안 유교의 본 모습을 모르는 채 비난만 해왔다. 서양의 것을 쫓느라 우리의 것을 너무 괄시했던 것이다. 이제 유교의 이마에 붙은 주홍글씨를 떼며 암울한 세상을 구원했던 공자 맹자의 처방전을 다시 꺼내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제자 안연이 인(仁)을 물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극기복례라, 단독자로서의 나를 이겨내고 상대방과 더불어 함께하는 순간 인(仁)이 되지. 단 하루라도 극기복례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이 문득 인으로 바뀔 거다. 그 변화는 나로부터인 게지, 상대방으로부터가 아님이랴!”

이 구절은 ‘내가 변하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 라는 말로 재번역할 수 있다. 공자사상의 핵심 인(인)이란 ‘함께 더불어 하기’를 말하는데, 나만 존재했던 나 중심의 사고에 익숙했던 일상을 뒤집어 그대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로 전환하는 순간 평화의 길이 툭 열린다.

사람다움이란 너와 나사이 어디쯤에 있고, 정치의 역할이란 함께 더불어 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덕치, 여민동락의 세상이며 극기복례가 실현되는 것이다. 실로 유교는 오래된 미래 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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