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에 어울리는 시 한 번 읽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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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에 어울리는 시 한 번 읽어보시죠
  • 충북인뉴스
  • 승인 2014.04.03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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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 밀려오는 노영임 시인의 <여자의 서랍>
김선호
충북도 문화예술과장

봄이 무르익는다. 아직 목련이 한창이거늘 때 아닌 고온으로 무심천 벚꽃이 벌써 절정이다. 개나리도 노랗다. 산에는 산수유와 진달래가 한 세월을 공생한다. 봄꽃도 피고 지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올봄은 마구 다투어 핀다. 그래서인가 꽃 향도 각양각색이고 한결 짙다.

봄은 지극히도 모성적이다. 만물을 일깨우고 젖을 물리며 소생시킨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T. 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를 통하여 역설하지 않았던가.

▲ 제목: 여자의 서랍
지은이: 노영임
출판사: 고요아침
노영임 시인의 시집 <여자의 서랍>은 봄에 읽으면 감동이 더해진다. 그는 시조시인이다.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젖 물리는 여자’로 등단했다. 2008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신진예술가, 2012년에는 현대 충청 신진예술인으로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에도 실려 있는 그의 등단작품 ‘젖 물리는 여자’를 먼저 읽어보자.

‘뜨건 국밥 후후 불며 젖 물리고 앉은 여자/어린 건 한껏 배불러 빨다가 조몰락대다/꽉 쥐고 해살거리며 또글또글 웃는다//한길에는 늦게 깨어난 게으른 햇살들이/엉덩이를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가는/살짝 휜 S라인 여자들 발꿈치 좇고 있다//공갈빵처럼 부푼 가슴 아슬아슬한 실루엣/필라멘트 깜빡깜빡 전류를 방출하는/뾰족한 고욤 두 개가 손끝만 대도 터질 듯//휘청, 가는 허리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둥지 속 알 넘보듯 집요한 사내들의 눈/왜일까, 늪에 빠지듯 지독한 허기 몰린다//순환소수처럼 잇고 이어 사람에 사람을 낳은/빌렌도르프 비너스* 따뜻한 양수의 기억/넉넉히 젖 물려주는 그런 여자가 그립다’

요즘 낮은 출산율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걸 의식했든 아니든, 사내들이 S라인 몸매로만 눈길 돌리는 이 세태를 시인은 과감하게 거부한다.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여성 나상처럼 풍요와 다산을 흠모한다. 한창 물이 올라 번식이 한창인 봄에 참 잘도 어울린다.

‘저마다 눈 하나씩 달고/두리번거리는 나무 촉수들//봄비가 물뿌리개처럼/쪼르르/마른 숲 적시자//즙!즙!즙!/오므렸다 폈다/어린 것들/ 젖 빨 듯’

시집의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초유’라는 단수 시조다. 아아, 얼마나 오래도록 갈증의 고통을 견뎌왔던가. 꽁꽁 언 동토 속에서 숨죽인 고행은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새 촉을 틔우고 오랜만에 맛보는 봄비는 그야말로 초유보다 달 것이다.

‘어디서 옮겨온 걸까 풀섶 너른 자리에/쇠뜨기, 애기똥풀, 달개비, 여우꼬리풀/푸지게 퍼질러 앉아 무리 이루던 봄날//개미란 놈 생으로 송장벌레 자근자근 씹듯/산능선 깔아뭉개며 포클레인 들어설 때/다북쑥 한 소쿠리씩 벌러덩 나자빠진다//크레인 움직임 따라 길의 방향이 바뀌고/도면처럼 고층 아파트 무리져 솟아오르자/하늘도 조붓해지니 햇볕 한줌 가웃이나 될까?//허릿심 고추 세워 허공에 선 댕댕이덩굴/펜트하우스 그늘 피해 맞은편 빈터 쪽으로/철조망 꽉, 움켜쥔 채 아슬아슬 넘고 있다’

‘빈터’라는 네 수짜리 연시조다. 어느 봄날 시인은 공사현장을 목격한다. 쇠뜨기, 애기똥풀 같은 자연이 살던 곳을 하늘로만 높이 뻗는 인간의 욕망이 점령한다. 살길을 찾아 아슬아슬하게 철조망을 타야하는 약자들의 현실이 처절하다. 왜곡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 매운 회초리다.

<여자의 서랍>에는 5부로 나뉘어 모두 63편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해설을 쓴 이승하 시인은, ‘이 시집은 시간과 공간의 진폭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넋을 잃기도 하고 교육자로서 현장의 경험을 육화시키기도 한다.

장삼이사들의 삶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관찰력과 고전을 멋지게 재해석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호평한다. 봄에 꼭 한번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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