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호국용사 유해는 거두고, 학살양민은 다시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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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용사 유해는 거두고, 학살양민은 다시 묻고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4.06.2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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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보도연맹유족회, 보은 아곡리 학살매장지서 20여점 유해 확인 지자체 발굴 촉구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4주년 되는 해다. 6월 그날이 다가오면 우리 언론에 등장하는 단골 기사가 있다. 이름모를 산야의 전투중에 숨진 전사자들의 유해발굴 소식이다. 국방부는 지난 2000년 유해발굴감식단을 발족해 14년째 호국용사 유해발굴 작업에 나서고 있다.

지금까지 전사한 아군과 적군 유해 8744구를 발굴했고 충북에서는 국군 120구, 적군 34구 등 모두 15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당시 격전지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하다보니 대상지역이 넓어 성과는 미미한 편이다. 올해 도내에서는 오는 11월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봉화산 일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 보은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양민학살 매장지 시굴작업 모습. 현장에서 수습된 유골 20여점.


해마다 6월이면 또다른 유해발굴 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 국군 경찰에 의해 집단사살당한 보도연맹원 학살현장의 발굴작업이다. 전쟁발발 직후 서울 이남 지역에서 경찰들은 좌익인사들을 예비검속으로 잡아들였다. 해방후 좌익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자수한 보도연맹원들이 주 대상자였다. 창고에 갇힌 채 기관총 세례를 받거나 산과 바다로 끌려가 집단처형당했다. 전국적으로 최소 수십만명 이상이 1950년 7월~10월까지 이렇게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대책위원회’(이하 충북대책위)의 조사결과 도내에선 최소 4,000명 이상이 40여 곳의 장소에서 학살됐다. 청주시와 청원군에서는 각각 1천명과 55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직후에 실시한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청주시 내덕동의 경우는 153명이 학살되었다. 단일 읍·면으로 가장 많이 학살된 지역은 청원군 오창면으로 300여명이 양곡창고에서 학살됐다. 옥천군에서는 500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이고, 영동군에서는 401개 자연마을에서 429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됐다.

한국전쟁 양민학살, 법원도 보상판결

이들의 ‘억울한 죽음’은 90년대 후반부터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유가족들의 모임이 결성됐다.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를 발족했다. 과거사위는 전국 주요 학살지에 대한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도내에서는 2008년 청원군 남이면 분터골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해 유해 332구와 총알과 탄피 등 총탄류 235점, 희생자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옷과 고무신, 버클과 허리띠 등 300여점을 발굴했다.

당시 과거사위는 청원 분터골 이외에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지경골, 보은 아곡리 등 도내 4곳의 현장에 대한 유해 발굴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자치단체는 발굴예산을 확보하지 않았고 진상규명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유해발굴만 진행할 뿐 민간인 학살자는 외면해 온 셈이다.

마침내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충북역사문화연대(전 충북대책위)가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 지난 23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학살현장에서 직접 유해 시굴작업을 벌인 것.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대표는 “이곳은 청주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 100여명이 끌려온 것으로 확인됐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시신을 수습해 묻은 현장도 잘 보존된 상태다. 그러다보니 유족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직접 유해 발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제 고령에 접어든 민간인 학살 사건 유족들의 피눈물을 정부는 더이상 외면해 선 안된다”고 말했다

청주상고 교사등 젊은이 100여명 피살

이날 시굴작업 현장에는 당시 시신을 수습한 주민 신덕호씨(86)가 참석해 증언했다. “그때 (1950년 7월10일께)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하고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구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서너대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불러놓구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

이곳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청주 가족들이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있다.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고 강해규씨(당시 30세)는 청주경찰서 무덕관(강당)으로 소집된 뒤 몇일후 아곡리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

지난 94년 본보 취재진을 만난 미망인 이숙용씨는 “가까스로 남편을 찾아갔는데 경찰서 트럭에 다른 젊은 사람들하구 앉아 있었어요. 그때 군인들이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준다’고 해서 그대로 믿었어요.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하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 있던 우산까지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 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학살현장 인근에 묘를 쓰게된 것이다.

아곡리 학살현장에서 포크레인으로 시굴작업을 벌인 지 30분도 채 안돼 팔·다리뼈, 두개골 등 유골 20여점이 나왔다. 박만순 대표는 유골이 잇따라 드러나자 일단 발굴을 중단시키고 유골을 현장 한쪽에 안치했다. “오늘은 정식 발굴이 아니라 유해가 이곳에 매장돼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의 시굴이다. 시굴작업을 통해 매장사실을 확인한 이상 정부나 자치단체가 서둘러 발굴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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