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만 있다고? 굴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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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만 있다고? 굴드도 있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4.06.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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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내가 살면서 책 소개 한 번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ven J. Gould)의 책 <인간에 대한 오해>와의 인연은 이렇다. 한국사를 전공하지만 현대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는 저서를 많이 내서 유명한 분이 있다. 말이 잘 통해서 이런 저런 잡담을 즐겼는데, 언젠가 중국집 원탁에서 내 옆에 앉아 뜬금없이 묻는 것이었다. “이제 방학인데, 방학 중에 읽을 만한 책 없어요?”

나도 방학은 책과 함께 시작한다. 학기 중에 미뤄놓았던 소설이나, 봐야 하지만 못 본 책을 밤을 패며 읽으며 비로소 자유와 학문의 열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교수들 좋겠소, 방학이 있으니?’라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교수들이 정작 바쁠 때는 방학이다.

노느라 바쁜 교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방학 중에 논문을 써놓지 않으면 학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기회는 이때다. 게다가 젊은이랑 놀아야 하는데, 현대소설이나 이슈서적을 보지 않으면 그들을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도 무시할 수 없다.

   
▲ 제목: 인간에 대한 오해
지은이: 스티븐 제이 굴드
옮긴이: 김동광
출판사: 사회평론
그런데 이 책만큼은 학술적으로도 대중적으로나 참으로 훌륭해서, 한 권을 보려다 그 사람이 지은 책을 모두 보았을 정도로 매력 있는 저술이었다. 하다못해 전공과목의 진도를 일찍 끝내고, 그의 책 다섯 권을 보고 발표하라고 했다가 학생의 반발을 사기도 했을 정도다. 그래도 나의 변명은 그랬다. 공부는 좁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은 넓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요? 한국사를 전공하는 분께는 엉뚱할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씀하시니 이 책만큼은 추천하고 싶네요.” 그 분이 나를 믿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 감사의 편지가 왔다. 선생님 고맙다고. 이야기 가운데 이런 구절도 있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분은 좋은 사람입니다.” 허허, 살다보니, 책 소개 한 권 잘해서 좋은 사람이 되다니, 그리고 술대접하겠다는 예약도 받다니. 역시 나는 훌륭해!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물론 이 책을 소개한 나도 훌륭하지만 정작 훌륭한 사람은 당연히 이 책을 쓴 사람 아닌가? 나의 훌륭함은 그의 훌륭함에 빗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른바 ‘호랑이 가죽을 쓴 여우’가 내 꼴이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잘 난 놈만 살아남는 건 아니다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것은 윌슨이라는 진화론자가 쓴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전사회적으로 퍼지게 된 말이다. 학문 간의 통섭이라고 많이 쓴다. 그래서 통섭하면 요즘 사회의 트렌드인 ‘융합’(convergence)과 더불어 공연히 따라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윌슨은 미국에서 강연회 때 물세례를 받는 등, 학문적 오만과 독단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의 학자들도 ‘통섭’(統攝)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생물학으로 모든 학문을 통일(統一)하여 포섭(包攝)하겠다’는 번역어를 버리고, ‘어울리고 더불자’는 뜻에서 ‘통섭’(通涉: 두루 통, 건널 섭)으로 쓰자는 주장도 많이 한다. 그만큼 윌슨의 주장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무서운 원칙이다. 요즘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최재천 교수는 자기 스승의 저서를 번역하면서 서문에 더 철저한 모습을 보여 윌슨보다도 더 윌슨답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하버드대학에 있었지만 서로가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내가 소개하는 굴드다. 사실 그 대학에는 윌슨을 반대하는 르원틴 등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쩐 일인지 재벌(언론)의 논리에 충실하다.

굴드는 같은 진화론자이지만 고대생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맛이 확 간’ 생물군을 잘 안다. 잘 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굴드를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의 고백 때문이었다. 그는 자폐아 아들이 자기 탓인지 알았는데,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다.

그래, 공부를 해야 가정과도 화목할 수 있고, 시대와도 화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본다. 물론 술도 먹는다. 참, 굴드는 이 책으로 1982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굴드는 이 책 외에 <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 <플라밍고의 미소>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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