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대 위기, 청석학원 후손들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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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 위기, 청석학원 후손들의 위기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4.10.1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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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계 김윤배 총장 퇴진 압박, 청암계 상속 재산 소송 제기
고 김준철 이사장 총장 취임 강행, 학교운영 직접 개입 화근
정부의 ‘부실대학’ 지정에 따른 청주대 분규사태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비상대책위는 1일 김윤배 총장의 이사장직 보장을 조건으로 사퇴를 재촉구했다. 대학 부실화의 책임은 묻돼 설립자 후손으로 학원 대표자 자격은 인정하겠다는 것. 사면초가에 몰린 김 총장에게 일단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김 총장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있다.

▲ 청주 가덕면 국도변에 세워진 ‘김원근 진휼비’

청주대 사태는 지난 6월 총동문회 사상 최초의 직선제 투표로 경청호 회장이 선출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총동문회가 변화의 선두에 섰고 교수회, 총학생회가 일사불란하게 힘을 모아주고 있다. 과연, 오늘의 청주대 사태를 설립자인 청암 김원근·석정 김영근 형제가 하늘에서 지켜본다면 어떤 심정일까? 사면초가, 고립무원에 빠진 손주에게 어떤 충고의 말을 건넬까?

필자는 2주전 청주시 가덕면 천주교공원묘지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흥미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보은쪽 국도에서 가덕면 병암리로 진입하는 도로가에 세워진 청암 김원근의 송덕비가 눈에 띄었다. 앞면에 ‘김원근 진휼비(金元根 賑恤碑)’로 적혀 있었는데, 진휼은 ‘흉년에 가난하고 군색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진휼청을 두어 재난에 빠진 백성을 직접 구제하기도 했다.

설립자 형제의 기부와 육영정신

진휼비 받침석에는 비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달았다. ‘이는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의 흉년 당시에 김원근 선생(청주대학교 설립자)께서 구해준 일에 감사하여 1935년 주민들이 세웠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마을 노인들은 “일제때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망쳤는데 그때 청주 부자가 동네마다 쌀을 나눠주는 바람에 목숨을 구했다는 거여”라고 얘기를 전한다.

이미 80년전 일이다보니 그때 구휼미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1920~30년대에 가덕면 이외에 청주 강서동, 남일면, 미원면, 강외면 등 총 7곳에 구제·진휼비가 세우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엄혹한 일제 수탈기에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청암·석정 형제는 적지않은 재산을 일제 군용기 헌납 등에 기부하는 등 친일행각이 드러나기도 했다. 청암은 충추원 참의라는 작위까지 받아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해방직후 반민특위의 피의자가 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도내에는 친일관료, 경찰에 대한 단죄 여론은 거셌지만 두 형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된 사업인 유통·금광업이 민원 발생 소지가 없었고 재난에 빠진 이웃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준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청주시디지털문화대전> 자료에는 “구휼·자선사업에 막대한 자산을 희사하였다. 1906년의 수재민 구호사업을 시작으로 1925년에는 조치원 및 연기 서면의 기근자 약 7,500여명을 구휼하였고, 1929년에는 청원군 남일면 두산리의 하천부지 6만평을 개간하여 844호의 농민들을 안착시킴은 물론 쌀 540가마를 단독으로 구입하여 3개 면의 재민 구제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5년과 1939년에도 청주 및 청주 인근의 흉작 기근민 구제에 앞장섰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충북전재민구제회장(忠北戰災民救濟會長)으로 활동하면서 구호 가옥 550여동을 세워 난민을 구제하였으며, 1954년에는 청주경찰서 3층 건물과 청원군 가덕면사무소를 지어 희사하기도 하였다”고 정리했다.

청암의 육영사업은 1924년 대성보통학교 창립으로 시작됐다. 이후 1935년 동생 김영근과 함께 청주상업학교(현 대성고)를 설립했고 일제 패망 1년전인 1944년 3월에 청주여자상업학교(현 대성여고)를 설립했다.

일제 당시 육영사업은 오늘날 일부 사학처럼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 되던 시절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4년제 청주상과대학을 설립해 한강 이남의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사립대학, ‘한수 이남 최고(最古) 사학’이란 기록을 갖게 된다. 두 형제의 가계에 얽힌 사연은 오늘날 청주대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다른 단초가 될 수 있다.

청암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동생 석정은 3형제를 낳았다. 전통 관례대로 청암은 석정의 아들중에 세째인 준철(고 김준철 이사장)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했다. 1965년 청암 타계 후 석정은 자신은 비껴서고 양자로 보낸 준철이 이사장직을 승계하도록 했다. 하지만 1976년 집안이 어른인 석정이 타계하자 청석학원의 내부분란이 시작됐다.

▲ 청주대 교정에 있는 청암 김원근(좌), 석정 김영근(우) 형제의 동상.

석정계 배제, 독단운영이 화근

고 김준철 전 이사장은 사전 협의도 없이 석정계를 이사회에서 배제시켰다. 당초 학원 정관에 명시한 ‘설립자 또는 그 자손으로서 각각 그 집의 호주인자 2인이 참여한다’는 후손 공동운영 조항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후 석정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이사회 참여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재단을 맡고 있던 김준철 이사장이 직접 대학운영을 맡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됐다. 1989년 학내 구성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장 취임을 강행했고 이후 고질적인 학내분규의 시발점이 됐다.

교육부에 각종 비리의혹이 제보돼 195필지의 학원소유 토지 횡령, 수익사업체 수익금 횡령(9억 2천여만원), 김준철 총장 두 아들(김윤배, 김상배)의 학사비리(학위 위조 및 날조), 건축 비리(일가 소유인 삼창토건의 수의계약 및 부실공사) 등 학원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1993년 2월 연임을 강행했으나 그해 8월 삼창토건에 대한 청주지검의 내사 소문이 퍼진 시점에 총장직 사퇴선언을 하게 된다.

김 총장 퇴진여론 확산 결단 압박

청석학원은 이후 2차례 초빙 총장을 선임한 뒤 2001년 김준철 전 이사장의 장남인 현 김윤배 총장을 선임했다. 이후 이사 교체 시기때마다 석정계는 2006년과 2009년 이사회 참여를 요구해 왔다. 석정계 후손 가운데는 김현배 충북일보 회장, 김경배 충북건설협회장 형제가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숙부인 김준철 전 이사장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더이상 목소리를 키울 수 없었다.

마침내 2011년 김 전 이사장이 지병으로 숨지자 이듬해 석정계는 김윤배 총장을 상대로 이사회 참여를 다시 요구한다. 하지만 역시 ‘모르쇠’로 일관했고 2013년말 학교 구성원 및 지역 여론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총장 4선 연임을 강행했다. 김 총장의 일방적인 독주가 계속되자 청암계내에서도 파열음이 나고 말았다. 지난 7월 고 김준철 전 이사장의 상속재산을 둘러싸고 자녀 등 4명이 김 총장 등을 상대로 상속재산 분할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

청주대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고인이 된 설립자 형제가 3세 후손인 김윤배 총장에게 전해줄 충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청암·석정 형제는 친일의 업보를 사회기부와 육영사업을 통해 덜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육영사업은 부실대학으로, 사회기부는 대학 적립금 3천억원 쌓아두기로 변질됐다. 대학 운영은 교육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다. 설립자의 뜻을 거스린 2세는 이미 불명예 퇴진했다. 더 큰 위기에 몰린 3세에게 설립자 형제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주저하지 마라. 아직도 늦지 않았다’

<청석학원 사태 연보>

1924년 대성보통학교(현 대성초등학교) 설립
1935년 청주상고, 44년 청주여상, 46년 청주상과대학 설립
1965년 청암 김원근, 1976년 석정 김영근 별세
1989년 설립자 2세 청암계 김준철 총장 취임
1993년 토지횡령 등 비리의혹 김 총장 사퇴, 석정계 신문광고 게재
2001년 설립자 3세 청암계 김윤배 총장 취임
2011년 김준철 전 이사장 별세
2012년 석정계 이사회 참여 요구
2013년 김윤배 총장 4선 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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