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가족의 서사에서 정치와 역사의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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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가족의 서사에서 정치와 역사의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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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0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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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26
윤정용 평론가

   
▲ 엔젤스 인 아메리카 (2003)
제작 마이크 니콜스 (연출) | 토니 쿠시너
출연 알 파치노 (로이 콘 역), 메릴 스트립 (해나 피트 역), 엠마 톰슨 (천사 역), 메리-루이스
토니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 제1부』(Angels in America, 1993)는 199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퓰리처상 위원회는 이 작품이 단순히 동성애와 에이즈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새 천년’을 앞둔 20세기 말 미국의 삶을 가장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최고의 극작품으로 평가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부제가 “새 천년이 다가온다”(Millenium Approaches)였다.

이 작품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을 잇는 ‘위대한 미국 연극’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3년에는 마이크 니콜라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골든 글로브상과 에미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오페라로도 각색되어 파리에서 초연된 후 세계 전역의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현재 다양한 장르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천사들, 제1부』열풍은 이 작품이 단순히 동성애와 에이즈 문제보다 더 큰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커밍아웃을 선언 후 인권운동

쿠쉬너는 청소년기에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인지하고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였고, 가족들에게도 고백했다. ‘커밍아웃’ 이후부터 그는 누구보다도 공개적이었으며 게이 인권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쿠쉬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서사극’의 창시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였다. 브레히트의 극 이론과 브레히트에게 영향을 미친 마르크스 이론을 탐독한 쿠쉬너는 연극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역사의 진보와 변화를 신봉하게 되었다.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 제1부』를 포함한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상황에 의해 ‘주변화된’ 힘없는 인물들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변증법적 진보를 모색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동성애 운동 덕분에 동성애자들이 활동 공간이 열렸다. 특히 60, 70년대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에이즈 위기 이후 동성애자들은 다시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즉 1981년 에이즈로 진단받은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자, 미디어가 이를 너무 과장되게 보도하며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 사회 전반에 동성애자 공포증과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확산되었다. ‘액트-업’이나 ‘퀴어 네이션’이 정치적 운동으로 표출했던 저항정신을 쿠쉬너는 연극으로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미국의 천사들, 제1부』다.

『미국의 천사들, 제1부』는 에이즈 확산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인 1985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재선에 성공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변화의 시점에 서 있었지만, 앞으로 나갈 동력을 잃은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 극은 에이즈라는 신체적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뉴욕의 동성애 사회를 강타하고 있음을 다양한 종교, 인종, 젠더, 직업의 스펙트럼을 통해 전경화 한다.

그러나 이 극의 스펙트럼은 에셀 로젠버그의 유령, 전 흑인여장 동성애자 벨리즈, 유대교 랍비, 환상의 여행사 직원 라이즈를 포함한 이 극에 등장하는 21명의 폭넓은 인물들의 거시적 전망이 아니라, 에이즈에 걸렸거나 정신적인 혼돈에 빠진 5명의 주요 인물들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망 붕괴와 새로운 유대관계라는 역학 구조를 통해 펼쳐진다.

   
 
   
 
미국 연극의 전통 계승

루이스 아이언슨은 애인 프라이어 월터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끔찍한 소식을 접한 후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는 프라이어의 당면한 죽음을 감당할 수 없어 그로부터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즉 세상에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는 루이스는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곤경에 처한 프라이어 곁을 떠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이 스펙트럼의 반대편에는 조 피트와 그의 부인인 하퍼 피트가 있다. 하퍼에 대한 조의 애정 결핍으로 인해 이들 부부 관계는 악화일로에 놓여 있다. 하퍼의 정신 상태는 붕괴 직전인데, 그녀는 신경안정제의 도움으로 상상의 여행 가이드와 함께 남극으로 환상여행을 떠나며 겨우 삶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 주의를 신봉하며 로이 콘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조 또한 내적 혼돈에 빠져 있다.

그의 정신적 혼돈은 그가 자신의 동성애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기인한다. 몰몬교 신자인 조의 도덕적·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동성애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힘겹게 억제하고 있다. 프라이어와 하퍼는 환각 속에서, 루이스와 조는 현실 세계에서 조우하며 서로의 삶 속에 개입한다.

이렇게 얽히고설켜 있는 두 쌍의 연인들 사이에 로이 콘이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말의 전형적 악마라 할 수 있는 냉혹하고 극악무도한 로이는 권력의 정상에 서 있는 성공한 변호사다. 특히 이 극에서 로이는 레이건 정부의 개인주의 강조, 사회적 프로그램 철폐와 같은 정책이 어떻게 개인적 영역에 영향을 미쳐 이기적 권력 탐닉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성공한 악마의 모습은 그의 표피일 뿐, 기실 그는 ‘커밍아웃’ 하지 않은/않는 괴이한 동성애자, 즉 동성애자에게는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동성애자임을 거부하는 동성애자이다. 그 역시 에이즈 진단을 받았지만 막강한 권력과 재력에서 비롯된 아집과 편견으로 자신이 쉽게 이 병을 극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극이 흥미로운 점은 쿠쉬너가 로이 콘을 단순히 악, 이기심, 기회주의의 화신으로만 그리지 않고, 그의 인간적인 약점과 함께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알 파치노가 로이 콘을 연기한다.

『미국의 천사들, 제1부』는 동성애와 에이즈 문제를 다루면서도 오닐, 밀러, 윌리엄스의 작품들처럼 가족 드라마의 틀을 유지하며 미국 연극의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이 극은 그 ‘개인과 가족 서사’의 폭을 ‘정치와 역사의 사사’로 확장·변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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