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의 연꽃방으로 길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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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의 연꽃방으로 길 떠나기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2.0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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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64호 보은 속리산 법주사 석련지-

8세기 석조(石槽) 걸작 ‘1000년 이상 지지 않은 가장 큰 연꽃’
8각 받침돌에 버섯대 같은 기둥돌이 몸돌 떠받친 ‘하늘의 연못’

김덕근 시인·충북작가 편집장

   
▲ 현재의 석련지 금강문과 사천왕문 사이에 있다.

입춘 무렵 속리행을 결심했습니다. 겨우내 속진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지만, 선홍빛 망개열매가 보고 싶고 까막딱다구리의 안부도 궁금해서지요. “한겨울 누더기 어깨를 두르고/산문이 문득 그리울 때”(조원진:<잠시 길 떠나기>부분)홀연히 길 떠나는 이른 봄맞이라도 가려는 듯 버스는 만원이었습니다. 홀로 묵언중인 일주문을 지나 오리숲 고목나무 가지에서 소중한 비밀을 쪼아대고 있는 딱따구리를 조원진 시인은 놓치지 않았더군요. 제겐 인연의 기운이 여기까지인지라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절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절간은 입춘기도로 모처럼 지대방 섬돌에 꽃이 활짝 피어 시끌벅적 하고 공양간도 수고롭습니다. 절 마당은 봄 햇살을 충분히 베고 누웠는지 싸리비질 자국이 더욱 선명해보고 오늘따라 천왕문 앞 전나무도 키가 커 보입니다.

이철수 화백은 ‘법주사 대불은 크다 크다 한다, 참으로 크면 그 소리 안 들었을 터’(이철수 판화 <법주사>)라 했는데, 참으로 큰 건 무엇일까요. 크고 작은 것 또한 사람들 마음에 있을 겁니다. 고통의 걸망을 놓아주고 중생들과 함께할 때 금동미륵님의 온몸에 피가 따숩게 돌아오는 철 이기도합니다.

금강문을 지나 오른편을 보면 법주사의 명물이라 할 수 있는 돌로 만든 연꽃을 볼 수 있지요. 마치 발우그릇이나 아니면 큰 공을 반으로 자른 모양입니다. 법주사의 3대 국보중의 하나인 석련지이지요. 석련지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모릅니다. 속리남유록(俗離南遊錄)에는 ‘석연대(石蓮臺)’(1634년)라 하여 ‘석련지’를 제를 올리는 것으로 보았지요.

박정양(1841-1904)의 포쇄일기(1871년)를 보면 법주사 전경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용화보전 5층으로 지었으며/그 안에 부처 하나 크기가 얼마 되나/수십장(數十丈)되는 키가 오층집에 가득하다/그 옆에 대웅보전 세 부처가 크고/좌우로 오백나한 가득히 늘어 앉아/얼굴마다 각각이오 모양들도 다 다르다/법당 앞의 작은 연못 석축을 잘하였고/”라 하여 기행가사로 산호전이라 불리던 용화보전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실제 2층의 전각이었지만, 5층으로 보일 정도로 높았던 모양입니다.

‘수십장이나 되는 키’에서 금색의 미륵장륙존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시한(1625-1707)도 산중일기(1686년)에서 “용화전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깎아놓은 듯 서 있는데, 그 위에는 뚜껑 같은 관석이 있어 비나 벼락을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용화전의 삼존불입상은 높고 크며 웅장하고, 뒤에 걸린 후불탱 세 폭도 역시 길고 큰 것이 일찍이 못 보던 것”이라고 용화보전의 위치와 장엄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용화전과 삼존불입상은 더 이상 볼 수 없지요.

원 위치는‘용화보전’과 ‘팔상전’사이

용화보전의 명맥은 아직도 이어져 대작불사인 금동미륵대불의 기단부 용화전에는 도솔천을 형상화시켰지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용화세계는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륵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간이 정토가 될 때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좌우로 오백나한 가득히 늘어 앉아/얼굴이 각각이오’를 보면 산호전 1000나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일부지만 용화전에 있던 나한을 팔상전에 모시고 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요.

박정양이 끝으로 주목한건 ‘법당 앞의 작은 연못 석축을 잘하였고’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법당이라면 용화보전을 말하지요. 그렇다면 ‘작은연못’은 무엇일까요. 여느 절과 다르게 법주사 마당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연못이 보이지 않습니다. 연꽃이 있는 못은 절간에서 극락정토의 모습을 현실세계에 구현하고 있는 거지요. 산중도량을 숨바꼭질처럼 다녀도 수정교를 지나서는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박정양이 본 ‘작은 연못’이 ‘석련지’일겁니다. 석련지는 법당 앞에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원래 ‘석련지’는 ‘용화보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었던 거지요. 금동미륵대불이라는 대작불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석련지’는 흔히 말하는 법주사의 창건기 가람의 장소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축으로 불리는 법주사의 가람배치는 팔상전-석련지-희견보살-용화보전의 미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미륵신앙으로 용화세계를 구축하려했던 건 여러 번의 불사와 함께 흩어지게 된 거지요.

‘속리산대법주사사적기’(1874년)에는 ‘연지석준(蓮池石樽)’이라는 말이 보입니다. ‘연꽃을 심은 연못’과 ‘돌로 만든 그릇’을 나누어 보면 석련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석련지는 공중에 떠있는 연못을 담은 그릇이었던 거지요. ‘석련지’란 말이 명명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1910년경 세끼노 다다시박사가 조선고적조사를 할 때 석련지에 연꽃이 있는 걸 봤다고 했고 당시의 사진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의 신문에도 종종 석련지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김도태는 ‘돌로 만든 석련지를 법주사의 큰 보물이라 하며 아래는 돌기둥으로 위에 올라가며 둥글게 연못모양으로 확을 팠는데 거기에 연꽃(蓮花)나무를 심었습니다’(동아일보,1939.1.22)라 하여 독자에게 사진과 함께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석조(石槽) 갈래에서 석련지는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 석조는 사각형모양으로 배수구가 있는 수조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법주사에도 기다란 네모형의 석조가 있으니까 어렵지 않게 비교할 수 있지요. 석조의 대부분은 수조의 역할에 충실한 것들이고 연지모양의 석조는 많지 않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석련지라는 이름의 석조는 법주사 석련지 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다른 것들은 연꽃모양이라도 석조라고 부르지요. 연지형의 석조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고 섬세한 유일한 국보입니다. 석조의 양식사적 측면에서 보면 석련지는 연지형(연못모양)으로 그 원형은 백제의 대통사지 석조라 할 수 있지요.

사찰내 석련지는 법주사가 유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백제를 건너온 연지형은 석련지를 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절간에 석련지가 있는 곳은 법주사뿐입니다. 우현 고유섭(1905-1944)선생도 석지로서 이만한 걸작은 동서천지에 없다고 했지요.

연꽃모양의 석련지는 본전이었던 용화보전의 장엄물로, 극락정토세계의 연지를 상징합니다. 석련지는 8세기 후반 제작된 걸로 추정합니다. 법주사 개산 도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연지는 둘레도 장정 세아름이나 되는 연지형 석조에서도 가장 크고 석공이 정과 망치를 다룬 솜씨 또한 뛰어납니다.

8각 받침돌에 버섯대 같은 기둥돌이 몸돌을 받치고 있는 석련지는 구름무늬로 둘러 쌓여있어 연지가 땅위의 못이 아니라 하늘의 연못처럼 보입니다. 운기화생(雲氣化生)으로 석련지의 기둥을 보면 우주수(宇宙樹)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구름은 비의 근원이자 생명의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석련지 기둥돌은 꽃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담아 청정한 극락세계를 세우는 버팀목과 같습니다. 구름은 판타지를 담아 정토세계와 하늘나라를 조형해내고 그 위의 연꽃이 더욱 생명력이 있고 상서롭게 해줍니다.

몸돌은 별다방 커피 잔 같이 커 보이기도 하고 초록별을 반으로 자른 것처럼 동그랗게 보입니다. 몸돌은 커다란 연꽃이 반개한 모양으로 둘레에 작은 연잎은 아래에 큰 연잎을 위에 돌려 법주사에서는 4계절 언제나 돌연꽃을 볼 수 있습니다.

석련지를 만든 장인은 만개한 연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반쯤 핀 걸로 다듬었지요. 화간반개(花看半開)를 안걸까요. 연은 겹꽃이기에 만개했을 때보다 봉오리일 때나 반쯤 피었을 때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던 거지요.

몸돌은 하나의 거대한 연꽃인데 올림연꽃을 8장을 새겨 연잎 안에 보상화무늬로 화려함을 넣었지요. 석련지를 만든 석수장이의 마음엔 돌을 보면서 돌 속에 연꽃이 들어와 있었을 겁니다. 석공이 돌을 다스려 연꽃이 아닌 것을 모두 쪼았을 때 연꽃은 일주문을 걸어서 절 마당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법주사에 비로소 연지가 들어서는 순간입니다.

석련지의 창의적 발상은 연지의 테두리에 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연지를 마냥 그냥두기가 허전했을까요. 손상된 부분이 많아 이가 빠진 것 같아도 이것마저도 남지 않았다면 석련지의 온 모습을 그려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석련지의 난간은 크기로 보아 기능적인 의미가 아니라 분명 장식적인 요소로서 장엄함을 더 해주는 구조물입니다.

사악한 기운을 막고 연지 내부의 신성한 기운을 보호하고 경계하는 금줄과도 같이 보이기도 하고 시각적 안정성을 주지요. 곡선의 부드러움을 한층 뽐낸 석연지에게 절제와 우아, 정교와 풍성, 균형잡힌 비례 등을 들어 사람들은 칭찬을 하지요. 난간 없는 석련지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연지의 테두리에 난간, 창의적 발상

석련지가 주는 여운을 상상력으로 끌어들인 시인의 시적 법거량을 볼 수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석련지를 보고 “자세히 눈을 씻고 보면 몇 마리의 호법신의 사자가 이마로 이고 있는 건 불법의 상징인 연꽃이고, 또 그 피어있는 연꽃 속은 맑고 향기로운 불법의 호수인 걸 본다”면서, ‘석연지식 미학’을 빌어 불교적 상상과 은유를 말하고 있지요.

‘세 마리 사자가 이고 있는 방에서/나는/네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만 혼자 알고 있는/네 얼굴은 눈썹을 지워서/먼발치 버꾸기한데 주고//그 방 위에 새로 핀/한송이 연꽃 위의 방으로/핑그르르/연꽃잎 모양으로 돌면서/시방 금시 올라 왔다/(서정주:<연꽃위의 방>부분) 석련지가 방으로 방위의 연꽃으로 이르는 과정은 눈썹까지 뻐꾸기에게 주어버려야 보이는 쉽지 않은 길이지요. 핑그르르 시방 금시 말입니다. 참 여법한 돌 연못의 사연이지요.

하늘의 연못인 천년의 지지 않는 연꽃을 피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김주대는 그 석공을 찾고 있습니다.

돌 속으로 꽃을 찾으러 들어간 사내가
기어코
지지 않는 꽃을 들고 나왔다
돌 속을 돌아다니느라 목마른 사내는 집으로 돌아가고
그 꽃은 법주사 마당에 천 년 동안 피어 연못을 인 채
목마른 사내를 기다리고 있다
(김주대: <석연지>전문)

돌속으로 꽃을 찾으러 들어가는 무모한 행위가 없었다면 오늘의 석련지는 없을 겁니다. ‘목마른 사내’는 누구일까요. 시인은 그 사내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어디에도 꽃은 부재중이었을 테니까요. 중요한건 ‘지지않는 꽃’을 들고 나왔다는 거고 돌 속에 돌아다니느라 목이 말랐다는 겁니다. 그 ‘목마름’과 ‘연못’이 만다라의 그물처럼 연결되어 석련지가 석련지다워짐을 시인은 포착한 거구요.

절간에 석련지가 있는 곳은 속리산 법주사뿐입니다. 비밀의 사원처럼 석련지에 나툰 하늘거리는 연잎 몇 장과 꽃봉오리를 팔상전 뒤에서 살짝 훔쳐봅니다. 석연지엔 미륵부처님 얼굴도 보이고 지나가는 새도 쉬었다가고, 팔상전 처마도 하늘빛도 사람들의 마음도 고요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석공의 극진한 정성’, ‘중생의 소망’ 그리고 ‘돌이파리가 파르르 떠는’(임강빈:<법주사 석련지>) 1000년 이상 지지 않은 가장 큰 연꽃을 만나려면 법주사에 가면 됩니다. 단언컨대 무거운 마음의 사다리를 한쪽에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석련지는 우주의 울림을 보여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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