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도울 방법 어디 없을까?
상태바
이런 사람 도울 방법 어디 없을까?
  • 홍강희 기자
  • 승인 2016.10.18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준 가구제작 명장 옥좌·가마 등 왕실가구 ‘공예페어’ 때 인기 최고
변변한 작업실·전시실 없어 청주 정북동 농가에 작품 방치 ‘대책 절실’

▲ 이성준 가구제작 명장. 뒤로 보이는 게 옥좌이다.

1945년 충주 출생. 전승공예대전·동아공예전·서울공예품경진대회·현대미술대상전 등에서 수상. 1995년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 1999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2002년 경복궁 유물 소장품 운현궁 가구제작. 2002년 전국기능경기 가구부문 심사위원. 대통령·경기도지사·청주시장 표창장 수상

얼마전 막을 내린 공예페어는 나름 재미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이 만든 공예축제에서 관람객들은 먹고, 만지고, 사고, 즐겼다. 간단한 음식을 먹고, 각종 생활자기·목공예품·장신구 등을 샀으며 체험코너에서는 남녀노소가 같이 어우러져 뭔가를 만들었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좀 더 형식을 갖추고 근엄하다면 공예페어는 대중적이고 쉽고 편하다. 공예비엔날레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공예페어에 와서는 편하게 즐긴다. 행사기간 5일 동안 관람객 6만여명, 매출액 2억여원으로 지난해보다 대폭 늘었다.

그중에서도 송파 이성준(72) 가구제작 명장이 보여준 작품들은 큰 화제가 됐다. 임금님이 앉던 의자와 가마, 용상 등 왕실가구는 규모와 솜씨면에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많은 관람객들이 이 명장의 부스로 모여들었다. 책장·약장 같은 일반가구도 있었지만 가로 4m, 세로 3m를 훌쩍 넘는 옥좌는 경복궁 근정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 임금이 궁 밖으로 거둥할 때 타던 가마도 매우 섬세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약장과 밀양반닫이, 탈조각 책상 등에서도 장인의 솜씨를 느꼈다는 게 많은 사람들 얘기다.
 

갑자기 청주로 왔으나 살 길 막연

그런데 이 명장이 작품들을 보관할 공간조차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는 58년 동안 가구를 만들고 명장 칭호까지 받았으나 생활이 곤궁해 변변한 작업실도 없다.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농가에 ‘명인공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작업실로 쓰고 있지만 가보니 작업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방 한 칸과 작품을 켜켜이 들여놓은 창고 하나, 톱질을 할 수 있는 공간 한 개가 전부였다. 공예페어 때 보여준 옥좌 기둥 두 개는 놓을 데가 없어 작업실에 아무렇게나 있고, 창고는 작품들로 꽉 차 있었다.

▲ 청주시 정북동에 있는 명인공방 전경.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빈 농가를 빌려쓰고 있다.

그는 “의정부에서 살면서 근근이 작업을 해왔는데 2012년 10월 갑자기 청주로 오게 됐다.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준다고 해서 고민 끝에 왔으나 말 뿐이고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청주로 올 때 의정부 공방을 처분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정북동 빈 농가를 빌려 쓰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준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1945년 충북 충주시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난 그는 집수리 목수 일을 하는 부친 영향을 받아서 였는지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13세 때부터 나무를 만지기 시작해 17세 되던 해인 1962년 상경해 서울 가구공장에 취직했다. 이후 1980년 독립해서 수유리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인테리어 가구를 만들었다.
 

▲ 초라한 작업실. 가운데 보이는 게 옥좌에 쓰인 기둥이다. 마땅히 둘 만한 공간이 없어 이렇게 놓여 있다.

58년 세월 만큼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각종 공예대전에서 상을 휩쓸고 1995년에 가구제작 명장, 1999년에는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외국 특별전 초청도 많이 받았고 대통령·경기도지사·청주시장 등에게 표창장도 받았다. 2011·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도 참가했다. 정북동의 허름한 농가에는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대변하는 각종 상장과 메달이 즐비했다. 낡은 선풍기 아래서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팻말도 보였다.
 

이 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동안 상을 원없이 탔다. 1980년부터 IMF 사태가 나기 전까지 10여년 동안 돈을 벌어 그럭저럭 살았는데 1999년부터 어려워져 집세도 못냈다. 가구 재료비를 카드로 샀는데 이것이 그대로 빚으로 남았다. 그래서 수유리 집을 팔고 의정부 농가를 얻어 옮겼다. 의정부에 작은 집과 공방을 마련했다. 지금은 집만 남았다"고 말했다. 더욱이 직장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책임지던 딸마저 올해 2월  갑자기 저세상으로 가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왕실가구 기증의사 있다”

그가 청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1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때. 이후 지난해 공예비엔날레에 참여했고 같은 해 전통공예워크숍에서 전시·제작시연을 했다. 이번 공예페어 때 선보인 옥좌는 완성하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 하나하나 조각하듯 파고 다듬고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데 걸린 시간이 4년이라 한다. 가마는 1년. 이로 인한 수입이 없으니 사는 게 막막할 수밖에 없다.
 

▲ 공예페어 때 선보인 임금님 가마

하지만 옥좌·가마와 왕실가구를 토대로 만든 탁자와 의자는 일반 가정에서 쓰기 어려운 것이라 팔리지 않는다. 크기가 크고 값도 비싸다. 이 의자는 세종대왕이 앉던 것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책장이나 약장 같은 다른 가구 역시 이번 공예페어 때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시간과 공이 들어간 만큼 가격이 비싸 관람객들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 씨는 작업실과 전시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전시실이 생기면 옥좌·가마·용상 등을 기증할 의사도 있다. 내년에는 충북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충북에 거주한지 5년이 돼야 신청할 수 있다. 그는 “앞으로 한 10년 일할 수 있을까? 내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의정부 집에도 더 이상 놓을 공간이 없다. 지금 있는 정북동 농가는 청주로 내려와 갈 데가 없어 임시로 있는 곳이므로 작업실도  한 칸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청주 공예는 내년에 영국으로 나들이를 가는 등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내년이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10회를 맞이한다. 시작한지 20년이 다 됐다. 이 정도 역사를 가졌으면 공예가들을 위한 작업실과 전시관, 미래의 공예인들을 길러낼 공예학교 등 소프트웨어를 채워야 한다는 게 문화예술인들의 말이다.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은 “공예페어 때 이성준 명장을 시장님께 소개했다. 시장님께서 ‘초정에 세종대왕 행궁을 복원하면 전시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말씀하셨다. 도와주고 싶지만 재단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안타깝다”며 “청주가 국내 최고의 공예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 작품을 켜켜이 쌓아놓은 창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