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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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계단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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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을 달린다. 차창밖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쑥부쟁이의 가을은 화려 하지도 천박 하지도 않으면서 소박한 은은함으로 우려내는 보랏빛 이었다. 비록 향기에 취 할 수는 없으나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꾸미지 않아도 화려한 보석만큼이나 찬란한 이 가을은, 소리 없이 그 빛깔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끌리듯 가을 속으로 달리다 보니 진해에 있는 제황산에 그 발길이 머물렀다.

365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진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른다. 이 계단은 365일, 즉 일년 열두 달, 세월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일년 계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계단 한 칸은 하루인 셈이고 10칸 단위로 숫자가 씌어 있다.

처음엔 재미삼아 숫자가 씌어진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일년 계단 양옆으로는 오색물이 든 벚나무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연두 빛 가슴으로 오던 봄, 열정으로 타오르던 여름이 진한 아픔으로 이별을 하고 있다. 만남은 언제나 필연적인 이별을 기쁨 뒤에 숨기고 있다. 나는 날마다 이별을 하면서도 그 이별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낙엽이 떨어지는 한 칸의 계단위에 서니 지나가는 오늘이 보인다. 매일 떠나보내는 오늘이 어제가 되고, 희망을 품고 기다리던 내일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오는데 내일을 소망처럼 늘 기다리고만 있었다. 하루의 의미를 애틋함으로 가슴에 담아 가슴 저리도록 사랑 하고픈 오늘이다. 계단위에 떨어진 낙엽 하나 주워드니 얼룩진 세월들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린다.

병상에 누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앞에 두고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데 병실을 정리 하고 채워진 쓰레기통을 비우며 병실 복도에 버려진 휴지도 주웠다. 한 마음 돌리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하다며 너그럽고 넉넉한 모습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난 知人이 문득 생각난다.

시한부 생명 앞에 하루의 의미는 어떤 걸까?
소설 ‘가시고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오늘은 어제 죽어 간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라고.

하나의 꽃을 피우기까지 빛은 얼마나 떨렸고, 하나의 낙엽이 되기까지 바람은 또 얼마나 불었을까! 봄이나 여름보다 가을엔 소리 없는 결별이 가슴을 파고든다. 뒤틀린 채 말라버린 회한을 눈물로 적셔내며 견딜 수 없는 몸짓으로 오늘의 가지 끝에 애써 매달려 본다. 하루 하루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버석거리며 밟히는 상념들이 가슴에 허무함으로 쌓여 간다.

먼 훗날 나 또한 내 세월의 계단 어디쯤에서, 떨어지는 갈색의 낙엽을 닮아 있겠지. 하루하루가 쌓여 그려진 억겁의 세월을 두고 보니 우리 인생, 참으로 잠깐 스치는 한 순간이구나! 저 하늘에 구름이 모였다 흩어짐도, 벚꽃의 화려한 모습도, 만나고 헤어지는 일, 나고 죽는 일이 모두 한 순간인데 지명을 앞에 두고 돌아보는 삶은 여전히 내 육신의 평안만을 먼저 생각하고 내 안에 나로 그득 채우느라,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옹동그리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살아간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삶들이 안개처럼 뿌옇게 피어오른다. 무얼 위해 가슴 가슴마다에 미움을 남기고 생체기를 냈던가! 또한 내 가슴에 상흔은 얼마나 많았던가. 나를 스쳐간 얼굴들이 보고 싶다! 세월의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 그들을 만나서 따스한 마음으로 손이라도 잡으면 빈 몸으로 서 있는 저 나무들처럼 가뿐할까!

모처럼 일상의 틀을 벗어나 웃고 떠들며 유쾌한 마음으로 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르는 길은 비록 힘들지만, 가을 소풍이라도 나온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했다. 단풍이 고운 가을 속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일처럼, 녹록치 않은 우리의 인생길, 그 삶의 계단을 오르는 일도 소풍 나온 듯 즐기고 마음을 나누며 걸어 갈 일이다.

영원한 세월 속에 우리의 생을 자로 잰다면 얼마나 될까? 어쩌면 한 점으로도 표시 할 수 없을 만큼 짧다는 생각을 하며 이 계단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 하거나, 허술하게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발끝에 차이는 돌 하나, 개미 한 마리, 보이는 것마다 새록새록 새로움이 더해 간다. 모든 것들이 인연인 듯, 하찮게 보이던 것들 마저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꿈도 연극도 아닌 현실 속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하며 서툰 삶의 계단을 오르느라 지쳐 있는 나에게 벚나무 뒤에서 숨어 엿보던 바람 한 자락이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보듬어 주었다. 이렇게 한 줌의 바람도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줄 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순리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의 계단을 물들이다 보면 나를 옥죄이고 불편하게 했던 허세들은 사라지고 어느 덧 이 가을, 벗은 나무의 아름다움을 진실한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 삶 모두가 서툴지만 나의 가을은 바람에 휘둘려도, 비가 내려도 그저 풀꽃으로 만족하며 이렇고 저렇고 따지는 일없이 그렇게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절로 지고 마는 소박한 쑥부쟁이를 닮아 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세월의 계단으로 내 서툰 삶의 이야기들이 낙엽처럼 쌓여 간다. 바람소리 들릴 때마다 떨어지는 낙엽은 나그네의 가슴을 울린다. 계단은 언제나 그 곳에, 늘 그대로 있었고 한 계단 씩 오르며 세월 속을 지나가는 이는 바로 우리들이다. 변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계단을 오르며 땀 흘리는 이에겐 한 줌의 바람으로, 목마른 이에겐 한 모금의 물로 마음마다 섬섬히 스며들어 따스한 정으로 한 칸 한 칸의 계단에서 아픔을 달래주고, 또 한 칸의 계단에선 슬픔을 나누고, 돌아보는 저 아래 계단으로 미움을 버리고, 오늘의 발길 머무는 곳마다 사랑의 마음 다짐하듯 심어두면 내 생애의 온 계단에 낙엽의 향기로움이 가득 하리라.

먼 훗날, 이 계단을 오르던 날은 그리움처럼 묻어 두고 이따금 달빛 향기 내 창문에 가득 넘치는 날엔 옛 마음 물결처럼 일렁거려보고, 문풍지 우는 가을밤엔 베갯닛도 촉촉하게 적시며 그 세월! 또, 한 세월 속에 고이 간직하리라며 세월의 계단을 오르느라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어느 덧 정상에 올라서니 진해 군항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해상을 호령하던 옛 장군은 어디로 가고 바다만 옛 모습인 듯 출렁거린다.

04, 한국문인 2,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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