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진출의 교두보 적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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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진출의 교두보 적성산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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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권<1> - 단양군<2>

   
▲ 구봉담
충주에서 월악나루를 지나고 수산을 지나 36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단양으로 가는 길에 장회나루 휴게소가 나타난다. 장회(長淮)라는 이름은 율곡 이이가 지었는데 충주호의 수위가 낮아지면 유람선은 이곳 장회나루까지만 운행된다. 단양팔경에 속하는 구담봉과 옥순봉이 보이는 넓은 광장 난간에서 강물 건너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충주호 수면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에 붉은 무덤을 볼 수가 있다. 이 무덤이 퇴계 이황만을 평생 사랑하며 절개를 지켰던 기생 두향의 묘이다.

   
▲ 옥순봉
제비봉(721m)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며 얼음골을 넘어서면 예전 배꾼과 떼꾼들이 쉬어가던 꽃거리와 소이산 봉수가 나오고 곧바로 우화교를 건너게 된다. 우화교 오른쪽으로 보이는 높다란 봉우리가 두악산(723m)이다. 마을 사람들은 소금무지산이라고도 부른다. 왼쪽으로는 넓다란 호수가 펼쳐지는데 그 수면 밑이 예전 단양이 있던 자리다. 우화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앞을 보면 하방리 뒤로 야트막한 능선이 나타나는데 그 산이 성재산(323m)으로 적성산성이 있는 곳이다.

단양군 하방리 산 3-1번지 적성산성이 있는 성재산으로 가는 길은 잡풀이 우거지기는 했지만 오르는 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성재산으로 오르며 무너진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취가 1979년 사적 265호로 지정된 적성산성이다.

   
▲ 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대에 축성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대인 545∼551년 사이에 축성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다랗게 반월형으로 배 모양을 하고있다. 성벽은 인공을 거의 가하지 않은 자연 할석(割石)으로 안팍을 포개며 엇물려 쌓은 내외협축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성의 둘레는 923m이며 성내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성내의 물이 모두 동남방의 낮은 지역으로 모여들어 배수구 1개소에서 모두 처리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성안에서는 신라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인 청자기와조각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말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단양 지역에는 당시 축성된 많은 성들이 있는데 적성산성도 이 중 하나이다.

새로 단장된 성벽을 따라 북동쪽 치성에 올라서니 성벽 앞으로는 남한강이 널직한 호수처럼 펼쳐진다. 타고난 험준한 지세로 남쪽으로는 죽령, 북동쪽으로는 영춘과 영월로 이어지는 남한강 상류지방, 북서쪽으로는 남한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청풍·충주로 이어지는 긴한목 중에서도 긴한목이다.

   
▲ 신라 주위치도. 진흥왕 대 이후 세력을 팽창해 갔던 신라는 전방에 군사 기지로서 주(州)를 설치하여 이를 기반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요충지인 적성산성은 동쪽으로는 두솔봉(1,314m)과 두악산(723m)이 산성과 연계되어 경상도 풍기로 넘어가는 남쪽의 죽령고개로 이어지고, 서쪽은 금수산(1,015m)과 제천의 가은암산성·남쪽은 소이산 봉수대·북쪽은 영춘의 온달산성과 이어진다.

적성산성 양옆으로는 단양천과 죽령천이 감싸 흐르며·정면은 남한강이 흐르며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천연의 해자를 이룬 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려면 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을 지역방어의 중요한 지점으로 신라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던 산성이다. 그러므로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적성산성을 점령한 후에 남한강 물길을 따라 한강을 점령하게 되는 북진의 거점이 된다.

깊은 물과 거대한 준령들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형적인 이점을 지닌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온달산성·가은암산성·독락산성·죽령산성·공문성 등 많은 산성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하고 북진정책을 이룩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가지 적성산성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팀이 발견한 적성비가 성안에 있기 때문이다.

적성비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1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문에 의하여 신라 법흥왕과 진흥왕 시절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의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뻗어갈 수 있는 요충지로 이용하였던 성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이 밝혀졌다.

   
▲ 적성비문
단양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적성현에 속해 있었으나 6세기 들어 강성해진 신라가 험준한 죽령을 넘어 북진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고 난 다음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적성비다. 높이 93㎝,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 두께 20㎝로 위가 넓고 두꺼우며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아들며 얇아진 역사다리꼴 형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머리돌이 없는 갈(碣)의 형태로 아랫부분 끝이 좁은 것으로 보아 받침돌에 꼽는 형식으로 세워졌던 것 같다. 3조각으로 갈라진 비석 중 현재 2개가 발견되었는데 글자크기는 1.5∼3cm로 총 글자수는 400여자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가 음각되어 판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풍의 해서체로 진흥왕 순수비보다 격이 낮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중국의 남북조 초기의 모양과 일치하여 서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적성비각
이미 발견된 창녕의 진흥왕 순수비보다도 약 10년 전 쯤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 비문에는 왕의 교시·당시 법령제도에 따른 호적기재방법·새 영토의 주민에 대한 회유정책·지명·인명·관직명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진흥왕이 직접 적성에 들렸다는 기록이 없어 순수비라고 할 수는 없고, 고관들에게 교시를 내려 포상을 하도록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땅을 점령한 다음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세운 전승기념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적성비는 현재 사방 한 칸의 팔작지붕으로 세워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단정하고 아담한 적성비각 처마 아래 서서 호수 건너로 눈길을 돌리니 남쪽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인다. 소이산(360m)이다. 소이산에는 봉수대가 있다. 연기나 불을 이용하여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재난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설치한 통신수단이 봉수다. 소이산 봉수는 경상도 동래에서 출발하여 한양의 목멱산에 당도하는 제2로에 속하며 경상남·북도의 내륙을 거쳐 죽령을 넘는 제2노선에 해당하며 경상도 영풍군 순흥부 죽령산 봉수의 연락을 받아 서쪽의 청풍군 오현봉수로 연결되던 곳이다.
   
▲ 적성산성 평면도

적성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도라지 밭에서 만난 70이 훨씬 넘었다는 촌로는 자신이 어린 시절 외중방리 봉산 언저리에 살았었는데 소이산에 올라가 봉수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적성산성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중앙고속도로 건설현장의 굉음을 들으며, 문득 천여 년 전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힘에만 의존하여 거대한 성곽을 쌓아올렸을 우리 조상들을 떠올리니 그들이 겪었을 고초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발 아래로 석양에 물든 붉은 호수가 삼켜버린 옛 단양의 정취는 찾을 길이 없고, 몇몇 산자락에 붙어있는 예전의 집들이 그나마 스쳐 가는 허허로움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1. 제비봉 :
단성면 장회리에 있으며, 산 이름이 제비봉으로 불리어진 것은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 방면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충주호 쪽으로 부채살처럼 드리워진 바위 능선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2. 긴한목 :
전쟁할 때 자기편에게는 긴요하고, 적에게는 해롭게 생긴 지점.

3. 율령 :
형률과 법령.

4. 이사부 :
신라의 장수. 일명 태종이며 성은 김씨로 내물왕의 4대손이다. 505년 실직주 군주가 되고 512년 나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5. 영월 왕검성(寧越正陽山城)
위치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연하리지정 : 문화재자료 제52호 (1984. 6. 2)『신증동국여지승람』 영월 고적조에는 “石策條二千三百十四尺高十九尺”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 영월 성지조(寧越城池條)에는 “正陽山古城條二千二百十四尺”이라 기록되어 있다. 서문이 정문으로 보이고 남문, 북문, 동문지가 모두 잘 남아 있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전체적인 성벽의 잔존 상태가 매우 좋다. 북문의 경우는 양쪽 문지가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축조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지형 지리적으로 요충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에서 남쪽 밑을 바라보면 남한강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한 눈에 들어오고 따라서 남한강을 따라서 현재의 영월로 진입하는 모든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읽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험준한 고산의 장벽을 피하여 상류 지역에서 하류로 진출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따라서 이 성은 그 축조 시기도 의외로 삼국시대까지도 소급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까지 변함없이 긴요한 전략적 기능을 지속적으로 담당한 요충적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성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와 축조 상태로 볼 때, 영월군 내의 성 가운데서 가장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그 정치적, 군사적인 기능이 중대했던 성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의 축성 시기는 막연하게 거란족의 침입과 연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월군내의 산성을 발굴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우선적으로 정밀한 조사를 실시해야 할 산성이다. 특히 산성 내부에 대한 발굴을 하게 된다면 이 산성의 축조방식 뿐만 아니라 그 지속적인 사용 과정과 최종 사용시기까지를 분명하게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이 산성의 훌륭한 경관과 지정학적인 위치 및 영월읍과의 근접성을 복합적으로 고려할 때, 일부 무너진 부분을 보축하여 완전한 성의 둘레를 복원한다면, 영월군의 가장 대표적인 산성인 동시에 역사적, 전략적, 축조 규모와 우수성 등 모든 측면에서 신라의 삼년산성에 비견되는 유적이 될 것이다. 
『영월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림대학교박물관, 1995)에서

6. 적성비 비문의 내용 신라 호적에 관한 학설 뒤집어
서기 551년경 신라 진흥왕이 직접 북한산을 순찰하면서 국경지대를 점검하고 왕궁으로 돌아오면서 점령지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1년간의 토지세와 특산품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인을 사면해 주면서 국가시책의 공표와 민심 안정을 위한 내용과 아울러 신라 율령에 관한 호적을 기재하면서 대인·소인·남자·여자·노인 등 다섯 등급 이외에 소자·소녀 등의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신라 경덕왕 이전에는 호적이 없었다고 주장해오던 일본학설에 대해 그 이전인 진흥왕 때부터 호적제도가 시행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비문에는 원래 고구려 땅의 지명인 적성현이 세 곳에나 기록되어 있으며, 비문에 나오는 이사부·비차부는 당시 신라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역시 비문에 기록된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과 함께 북진정책 당시 진흥왕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라의 고관들로 왕의 교시를 받아 신라의 국경을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적성인 야니차를 포상하고 앞으로도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왕의 약속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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