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2> - 제천시<2>
▲ 고산사 표지석 | ||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덕산면 신현리(용바위)와 한수면 덕곡리와의 사이에 산(527.5m)의 능선을 서북벽으로 삼아 남동쪽 신현리 방향의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 길이 가파르기는 하지만 승용차로도 고산사 앞까지 올라갈 수 있다. 와룡산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삭토와 토축으로 된 북벽·서벽·남벽이 있고, 동벽의 경우는 능선의 바깥쪽 비탈을 따라 석축으로 축성되어 있다.
▲ 남아있는 성벽. | ||
▲ 왕룡산성 동벽 내외 겹축성벽과 기둥홈 | ||
와룡산성에 올라보면 한가지 의문점이 발견된다. 이제껏 보아왔던 성들의 위치를 보면 육로나 수로를 차단하고 있는 모두가 한결같이 지형적으로 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와룡산성은 외떨어진 산골에 자리잡고 있다. 인접하여 코앞 송계에는 겹겹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중의 요새 덕주산성이 버티고 있고, 와룡산성은 남한강 수로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이러한 위치는 오늘날에는 궁벽한 산골에 해당되지만 과거에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교통로를 제어하는 위치이다. 즉 남한강의 요충지인 충주에서 동남쪽으로 통하는 가장 주요한 교통로인 죽령대로와 충주에서 죽령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문경의 동로면으로 통하는 모녀현로를 동시에 막을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와룡산성이기 때문이다.
▲ 와룡사 입구의 석축 벽 | ||
실제로 덕산에서 만난 60∼70대 노인들을 통해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경상도 소장수들이 소짚신을 신켜 벌렁재를 넘어와 덕산장을 보곤 했다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두대간을 넘는 죽령·새재·추풍령 외에도 많은 고개를 통해 왕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룡산성이 사용되었던 시기는 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성벽의 축조방식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기와류나 토기 파편들이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것들이고, 축조방법에 있어서도 고려시대 내륙지역에서 유행하던 석축 방식이 사용된 점을 미루어 이 산성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는 이미 잊혀진 산성으로 존재하였다고 여겨진다.
▲ 고산사 삼성각과 응진각. | ||
탱화는 글을 알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한 배려에서 그려진 불교에 관한 그림이다. 한창 단청을 그리며 고산사 응진각에서 일하던 서울 인부들 중 한사람이 응진각 뒤 바위에 쓰여진 한자를 알려주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잘 정돈된 산성을 답사하는 것도 좋지만 허물어진 산성의 자취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옛사람들의 체취를 느껴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이었다.
와룡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전국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약초장이 열리는 덕산장을 들렀다. 덕산면은 예로부터 약초로 이름난 곳이며 지금도 월악산에서 나는 약효 뛰어난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초상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모처럼만에 보는 시골의 오일장에서 예전의 왁자지껄했던 장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옛 정취여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전 대면 아무 것두 아니지.”예전의 영화가 못내 아쉬운 탓인지 장터의 목로에서 만난 촌로가 막걸리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촌로의 말에 의하면 하설산 정상부에도 허물어진 돌무더기가 있단다. 하설산은 월악산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는 산으로 그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나무를 하러 여러 번 올랐었는데 무너진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있단다. 분명히 산성이 있을 법한 곳이기는 했지만 직접 올라 확인할 길은 없었다.
1. 관세음보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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