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당한 제2의 고향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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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한 제2의 고향 ‘한국’
  • 충청리뷰
  • 승인 2002.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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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1]거부당한 제2의 고향 ‘한국’

국회 외국인 영주권·지방선거 참정권 법안 상정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해답은 두가지, 미국 또는 중국이다. 단기 체류자인 주한미군을 포함하면 미국인의 수가 가장 많다. 하지만 장기 체류자를 기준으로 할 때는 중국 국적의 화교(華僑)가 으뜸이다. 한국내의 가장 큰 소수민족인 셈이다.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나라 군사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군역상인 40여명이 국내에 남으면서 화교 역사가 비롯됐다.
하지만 120년의 뿌리를 가진 한국화교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Minerity)로 소외되고 있다. 3대에 걸쳐 살았지만 영주권조차 받을 수 없고 화교 학교는 교육부로부터 정규과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문 날인 거부등 인권투쟁을 벌여온 재일(在日) 한국인은 이미 영주권 제도를 통해 법적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화교의 인권침해에 눈감은 한국은 더 이상 세계화나 인권국가를 말할 자격이 없다. 지난 4월 일부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발의한 ‘외국인 영주권 취득법안’의 조속한 국회처리를 기대하며 청주를 중심으로 화교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해 본다.






화교1세, 포목·잡화점 많아

화교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때는 일제가 만주를 침탈한 지난 1910년대. 이른바 만주사변의 소용돌이를 피해 산동성에서 한국으로 삶터를 옮긴 경우다. 또 지난 40년대 후반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가열되면서 마치 전쟁난민처럼 이 땅으로 피신한 화교들도 많았다. 특히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인천에는 중계무역상인 화교들이 청관(淸關)으로 알려진 대규모 차이나타운을 이루기도 했다.
일제말 10만명까지 추산됐던 한국화교들은 70년대초 4만여명으로 줄어들었고 현재는 2만3000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49년 자유중국 정부수립 직후 상당수의 화교들이 귀국했고 이민 1세들의 사망과 한국정부의 외국인 경제제재로 인한 2세들의 제3국 출국이 확산돼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충북도내 화교 거주자들은 600여명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청주지역에 25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를 비롯한 충주, 제천, 음성, 영동, 진천(증평, 괴산포함)지역에 화교협회가 구성돼 친목을 다지고 있다.
당초 한국화교들은 인천, 서울등 수도권과 서해안 지역에 집중적으로 정착했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국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됐다. 충북의 화교들도 대다수가 전쟁이후 둥지를 튼 경우다. 화교 1세대들은 포목점, 잡화점으로 상업을 하다 한국전쟁 이후 태동관을 시작으로 중국음식점 개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때는 청주에서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30곳을 넘기도 했다. 현재는 경화반점, 신동양, 만추관, 극동반점, 북경, 대한각, 대동관, 아관원, 복성관등 9곳이 명맥을 잇고 있다. 수적으로는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중국요리의 참맛을 아는 손님들은 대부분 화교 음식점을 찾아나서기 마련이다.




사진설명:청주시 미평동 2천평 임야에 조성된 화교 공동묘지. 80여명의 이민 1세들이 이국의 땅에
교 소학교 도내 3개소
특히 청주에 일찍 뿌리를 내린 화교 왕씨 형제가 운영하던 주물공장(일명 솥공장)이 전국에서 물건을 떼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 현 청주노동사무소 자리에 위치했던 주물공장은 수입이 엄청나 ‘가마니에 돈을 담고 금궤를 쌓아둘 정도’였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50년대까지 사업이 번창했으나 왕씨 형제가 아편에 손을 대면서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 말년에는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살 정도로 곤궁하게 지냈다는 것. 오늘날 슈퍼마켓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화교 잡화점은 청주 영주성, 대성옥등이 유명했는데 한국 상인들이 일부러 찾아와 상술을 배워갈 정도였다. 한국전쟁 직후 설탕, 밀가루, 기름등이 주품목이었고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소다는 한국인들에게 ‘위장약’으로 인식돼 10배이상의 이문이 남는 인기상품이었다는 것.
충북에서 특이한 점은 고량주등 주류제조업에도 화교가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국내 고량주의 고유명사로 통했던 ‘동해고량주’ 제천 공장이 화교들의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였다. 충주에도 주류공장을 운영했던 이들은 외국인 규제로 인해 한국인과 합작형식으로 바꿨으나 막판엔 손을 떼고 말았다는 것.

70년대 외국인 규제로 대탈출

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에 이어 70년대 시행된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은 규제가 더욱 강화돼 화교들에게 1가구, 1주택, 1점포 소유만이 허용됐다. 그나마 집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이하로 제한했고 임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2세들이 커가면서 교육문제가 심각했으나 화교학교를 정규 중·고교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아 검정고시를 거쳐야만 한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현재는 외국인 특례입학 제도를 통해 화교 출신 학생들의 국내대학 진학이 크게 늘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화교학생의 80%가 대만대학으로 진학해야만 했다.
토지소유 금지조치로 화교들은 헐값에 땅을 팔거나 토지등기를 한국인 차명으로 바꿨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평동 원마루 일대에 3000평의 토지를 매입해 직접 농사를 짓던 화교 이모씨는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 조치에 따라 한국인 차명으로 등기이전했다. 하지만 명의신탁받은 한국인이 몇 년뒤 중과세 등을 이유로 거부하는 바람에 평당 1000원씩에 헐값으로 팔고 말았다는 것. 당시 미평동에 위치한 화교 공동묘지도 이씨 종중 땅으로 편법등기했으나 소유권자가 미국으로 이민가버려 사후처리에 애를 먹고 있다.

대만 국교단절 혼란겪어

특히 지난 92년 한·중 수교 직후 대만과 국교가 단절되는 사태를 빚게되자 한국화교들의 불안감은 엄청났다. “중국과의 수교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중국 국적으로 모두 바꿔야 하는지 한국정부나 중국대사관으로부터 제재는 없을 지 몹시 불안했다. 그때 충남북의 21개 지역 화교협회가 처음으로 연합회를 구성해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청주화교협회 이동석회장(51·경화반점 대표)의 말이다.
다행히 국교단절 이후 화교들에 대한 별다른 정책변화는 없었고 한국민들의 화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가까운 한국 이웃들은 이들의 입장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아직까지 화교들은 대만여권을 사용하고 있지만 중국 본토와 왕래가 자유로와 지면서 상당한 의식변화를 겪고 있다. “화교사회에서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이 컸고 반공을 내세운 청년모임이 별도로 운영될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과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정치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됐다. 중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극소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국적을 바꾼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중국 여권을 사용할 경우 대만출입등 여러가지 제약이 많아 꺼리는 입장이다. 현재는 중국 대사나 대만 대표부 대사나 가릴 것없이 화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이회장의 설명이다.
/권혁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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