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인가, 잡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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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인가, 잡초인가?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5.06.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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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태양이 빌딩 숲으로 쏟아져 내려 후끈한 열기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태양이 쏟아지는 오후의 거리, 플라타너스 넓은 잎만 무거운 바람결에 간혹 흔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이며 차들 모두가 지친 듯 보였다. 갈증처럼 삶을 향한 몸부림에 촉촉한 빗방울이 유난히도 그리운 날이다.

거리엔 사람들도, 차들도 많고 상점의 진열대들은 모두 화려했다.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저렇게 넘쳐 나는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은 대부분이 무표정한 모습들이다. 더위 탓인가? 아니면 그들도 나처럼 힘겨운 삶이던가?

삶에 지친 내 자신을 한 순간에 속없이 정말 속없이 흐트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차창으로 녹색의 향연이 스크린처럼 다가와 내 마음을 추슬렀다. 녹음 짙은 산이 달음질치는 벌판으로 초록바람이 싱그럽다. 말 그대로 하늘엔 흰 구름 두둥실 떠있고, 풀 향기 끌어안고 달려와 피부를 사르랑 사르랑 스쳐가는 바람이며, 농부들의 땀이 밴 초록의 벼 포기들,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싶다. 그들 모두 꼭 어머니의 품속인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온 나그네의 마음이 바로 이러 한가?

논둑 밭둑을 해매는 발밑에선 들꽃들이 생글거리며 바람을 쫒고, 자그마한 꽃 이파리들은 낯선 나그네를 향해 억센 풀 속에서 바람 따라 언뜻 언뜻 고개 내밀어 하얗게 웃어 주었다.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꽃들. 너무도 작고 여린 꽃잎이기에 솥 끝으로 잡기조차 힘들었다.

들꽃! 작지만, 그들은 사람이 가꾸지 않아도 유월의 바람 속에서 스스로 자라 꽃을 피워낸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고 앙증맞은 모습에 넋을 놓았다.

들꽃의 정교함, 싱그러우면서도 우아한 자태, 화려한 색상의 다채로운 모습들, 그들만의 향기, 부드럽고 섬세한 꽃잎들...

이걸 어쩐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내 눈을 통해 내 마음 안에 그들의 모습을 통째로 퍼 놓았다.

혹여 미처 보지 못하고 걸어갔더라면 아마도 내 발아래서 짓이겨졌을지도 모를 작고 앙증맞은 꽃잎들. 너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꽃인데 사람이 가꾸는 정원에서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보다 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안겨 주었다.

작은 들꽃들은 바람 불어도 비가 내려도 그들을 피하려거나 또한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비가 오면 꼬부라져도 소리 없이 맞고 있을 뿐이다. 자연의 섭리를 온전하게 몸으로 행하는 그들이다. 그것이 이 작은 들꽃들의 삶이다. 돌보는 이 없어도 저 혼자 나고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종족 번식을 하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떠난다.

그러나 들꽃들도 그 생은 모두가 각자 달랐다. 둑길에서 피어난 들꽃들은 유월의 바람을 즐기는데 농작물이 심겨진 밭고랑에 피어난 들꽃들은 농부아낙의 김매기를 통해 뿌리째 뽑혀 태양아래 밭둑으로 여지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밭둑엔 꼭 깨알만한 꽃잎들이 고개를 빼딱하게 늘어뜨린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내 삶 속에서 혹여 밭고랑에 싹을 틔운 저 작은 풀꽃처럼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곳에서 왕성하게 자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도 우리들의 삶과 흡사했다. 삶의 길은 결코 내가 원하고 선택 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 들꽃들의 씨앗은 어느 가을날, 바람에 날리고, 빗물에 떠밀려와 선택의 여지없이 이 밭고랑에 정착해 따뜻한 봄날, 희망처럼 싹을 틔웠다. 왜 하필이면 농작물이 심겨진 이 곳이었을까?

밭고랑에서 여린 풀꽃들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잡초 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이렇게 선택의 여지없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 어느새 왕성하게 뿌리를 내려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어디 우리 마음과 뜻대로 다 되는 것이던가! 아무리 예쁜 꽃을 피웠다 할지라도 원하지 않는 곳에 존재 한다면 이는 분명 잡초 인 것을.

과연 나는 내 인생길에서 들꽃인가, 잡초인가?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땅에서 잡초는 그 생존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보통의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없는 토박한 땅을 푸르게 만들고 토양이 침식되지 않게 흙을 붙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잡초는 가지고 있다 한다. 들꽃이건 잡초건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으니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리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척박한 땅을 가꾸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잡초가 내겐 더 매혹적으로 다가섰다.

지친 모습으로 도심을 떠났다가 빗물 머금은 한 폭의 풀잎처럼 돌아와 제 자리에 서 본다.

무겁게 흔들리던 플라타너스 잎들이 활기찬 손짓으로 나를 반겼다. 땀은 온 몸으로 구슬처럼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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