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보는 ‘대한민국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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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는 ‘대한민국스러움’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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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 석 (서원대 법학과 교수)

   
지난 무더위 속에서 터져 나온 X파일사건의 처리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열이 받다 못해, 대한민국스러운 모습에 우울해 진다. 알다시피 X파일의 내용은 삼성이라는 재벌과 중앙일보라는 언론사주가 마주앉아, 정치인들과 검사들에게 돈질하면서 우리나라를 떡 주무르듯이 장난질을 치는 것이다.

그 동안 이런 재벌의 행태에 대해서는 우리 주변을 떠돌던 소위 ‘카더라 통신’을 통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실체가 얼마나 뿌리 깊고, 전방위적인 것인가를 확인하면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많은 민초들은 그 내용을 전면 공개하여 지난세월동안 재벌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악행들을 모두 밝히고,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그 길만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우리사회를 청렴의 반석에 세울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할 정도로, 아니 우리가 늘 당해왔던 것처럼 본질은 숨겨지고 오로지 왜곡과 사술이 판치는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즉 기득권 세력들과 일부언론들은 문제의 초점을 엉뚱하게 통신비밀보장법·안기부법에 맞추려 애를 쓰고 있다.

국가권력이 불법으로 도·감청을 했고, 전직 정보원이 안기부법을 위반하여 녹취록 등을 불법으로 유출했으며, 그리고 불법 유출물을 매스컴이 무책임하게 보도한 것이므로 이들을 먼저 응징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분위를 잡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여론(?)에 착실히 부응하듯이 검찰의 X파일 수사는 불법 도감청의 규명 쪽으로 가고 있다. 테이프를 유통시킨 사람과 이를 입수해 보도했던 기자, 그리고 도감청 관련자를 수사하고 일부를 기소했다. 반면에 이학수 삼성 부회장에 대한 참고인조사도 했다지만 구색맞추기로 끝난 것 같다. 이대로 가면 수사의 결론은 도감청 관계자 처벌과 이후 유사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을 하는 선에서 마무리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사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X파일의 내용에서 검찰이 숨기고 싶던 치부가 들어난 처지에 어떻게 사건의 본질인 뇌물커넥션을 파헤쳐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려 하겠는가? 오히려 조직의 치부를 드러낸 불법도청한 놈과 이를 까발린 기자놈을 응징하는 것이 검찰조직의 태생적 속성일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수사를 받아야 할 범죄자가 오히려 고발자를 법의 이름으로 때려잡는 격이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코메디 중에서도 저질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불법도청에 대한 수사는 필요하며, 다시는 정권유지를 위해 국가기관이 개인의 사생활을 엿듣지 못하도록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X파일 사건의 본질 즉 재벌이 어떠한 파렴치한 짓을 했고, 그래서 우리의 온전한 정신들을 얼마나 파괴시켜왔는가의 실체를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본질은 은폐되고, 범죄자들이 피해자가 되는 요지경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도청테이프 공개 요구에 대해 사생활보호를 외치면서 ‘사회적 부정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불법 도청을 해도 좋단 말이냐? 하며, 적반하장으로 우리를 훈계하고 있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내밀한 사생활이 있고, 법은 사생활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X파일에 어디 권력자들의 은밀한 사생활만 있으며, 밀실에서 뇌물을 주고받고, 검은 돈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그것이 사생활인가? 그것은 보호되어야 할 사생활이기 이전에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범죄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어떠한 명분으로도 진상공개와 주인공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법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안다. 시기가 언제였건,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드러났건, 그와 같이 어마어마한 비리와 부정행위는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양심이고 역사의 진실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럼에도 현실은 우리사회가 겪어왔던 우를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정과 비리 사건이 항상 그러하듯이, 이번 X파일 역시 돈 있고(재벌), 힘 있고(언론), 권력 있는(안기부·검찰) 사람들이 얼키고 설킨 ‘가진 자들의 코메디’ 일 뿐이지만, 그 처리과정을 지켜보다보니, 돈 없고 힘없는 우리들은 그저 허탈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니네들 끼리 잘~알들 놀아 봐라”하고 그냥 팽개쳐 버리기에는 왠지 대한민국의 국민답지 못한 것 같아 제발이 저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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