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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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 충청리뷰
  • 승인 2019.10.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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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매 내몰린 집에서 근근이 산다
집에 대한 로망 무색한 비자발적 ‘하우스 푸어’
이 정 민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내게도 집에 대한 로망이 있다. 마당과 지붕이 있는 오래된 집을 사서, 솜씨 좋은 친구 몇몇과 오래된 벽지를 떼어내고, 새 벽지를 바르는 꿈. 대문을 들어서면 어린아이 키 만큼 자란 로즈마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고, 그래서 자주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게 되는 집. 부지런히 텃밭을 가꾸는 꿈.

비오는 봄 밤엔 아무렇게나 자란 냉이랑 쑥이랑 찹쌀가루 얇게 입혀 튀겨내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고, 여름엔 상추와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애인에게 “고기만 사오면 돼”라고 말하는 일. 그 사이 나는 수박에 과일청을 곁들인 소주 칵테일을 만들어 놓아야지. 마당 한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고, 가을 저녁엔 나무 밑에 꽃무늬 테이블보를 깔고 어두워 질 때까지 책을 읽는 상상. 날이 추워지면 싸구려 와인에 계피와 꿀을 넣고 끓인 따뜻한 뱅쇼를 밤 깊을 때까지 나누어 마시자. 아, 그럼 나는 사계절 취해 있겠구나!

그러나 현실은 하우스 푸어다. 하우스 푸어가 대개 아파트 시세차를 노린 자발적 선택이라고 할 때, 내 경우가 훨씬 불행하다. 경매에 내몰린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비자발적 결정으로 하우스 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 사이 빚이 늘었다. 원치 않게 생겨버린 집을 나서며, 나는 자주 ‘향후 나의 10년 노동의 결과가 겨우 이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아, 내게 날아든 경매통지서
음성원 작가는 말한다. "집에서 나와 걸어갈 수 있는 장소에 직장이 있고, 도서관과 커다란 운동장이 있으며, 맛있는 식당과 트렌디한 카페가 있다면 그 도시에서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울까." 나는 그때 오래되어 낡고 어두컴컴한 복도가 있는 나의 집을 떠올렸다. 사실 나의 집이야 말로 저 문장의 주어에 적합하다.

직장은 도보로 7분 거리에 있다. 직장 인근에는 도시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고, 사라진다. 도서관도 운동장도 미술관도 있다. 게다가 하천도 있어 언제든 맘만 먹으면 걷고 달릴 수 있다. 집을 임차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마당과 지붕의 로망은 미래에 두고, 현재 지불가능한 ‘풍요로운 삶’을 선택했다. 그런데 과연 나의 삶은 풍요로워졌는가?

임대인이 도착하기 전, 중개인이 말했다. 임대인이 부자라고. 청주 시내에 아파트가 60채가 넘게 있다고. 이런 사람들은 집 살 때 근저당 얼마씩은 끼고 산다고. 근저당이 얼마인지, 주변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세상엔 사기꾼도 없고, 집주인들은 모두 선량하기라도 한 듯이.

로망을 유예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통지서가 도착했다. 그 즈음 동탄신도시에서는 아파트 600채를 소유한 임대인이 잠적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고의경매로 세입자에게 집을 강매한 임대사업자는 형사고소를 당했다. 잠적하지 않았고, 고의경매도 아니었으니, 나의 임대인은 양심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집을 강매당한 건 매한가지다. 경매통지서를 받은 이후,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세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임대계약이 끝나지 않아 전세보증금 반환소송은 불가하다. 전세금반환보증을 들고 싶어도 매매가에 비해 전세가(+근저당)가 높은 ‘깡통전세’는 가입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근저당으로 인해 대항권을 갖지 못하니 전입신고와 임대차계약서 확정일자도 무용하다. ‘거리로 내쫓기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집을 인수받는 것 뿐 이었다. 결국 그의 갭투자 손실은 고스란히 나의 피해가 되었다.

600채의 소유주와 쪽방
신문과 방송에서 갭투자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2019. 4. 11일자 한국경제의 ‘수백채 갭투자자 줄파산...세입자 날벼락’ 기사는 흥미롭게도 청주를 다룬다. “충북 청주에선 공동투자에 나섰던 갭투자자 6명 소유의 아파트 121가구가 경매 절차를 밟고 있다. 이들은 2017년 전·월세를 끼고 신라아파트와 한울아파트를 대거 사들였다. 갭투자자들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대출금 이자를 갚지 못하자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들이 경매에 부쳤다”.

저 통계 수치에는 나의 임대인과 나의 집이 포함되었을까? 매일경제의 최근 기사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여준다. “창원, 거제 등지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갭투자 물건의 경매 처분 소식이 청주 등 충청권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북상’은 ‘쓰나미’ ‘역습’ ‘먹튀’ ‘투기’라는 거친 느낌의 단어로 바뀌었다.”

개인이 60채, 600채의 아파트를 소유할 동안 중앙·지방정부는 무엇을 했나. 주택공급과 건설경기부양이라는 허울뿐인 주택정책에 기대 건설사, 은행권, 임대사업자들이 배를 불리는 동안 숙박업소, 고시원, 판잣집, 비닐하우스, 쪽방과 같은 ‘주택이외의 거처’에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증가했다. 임차인을 보호하고 임대사업에 대한 투명한 과세 징수를 위한 ‘주택임대사업자 등록 의무화’, ‘임대차 신고제’ 등의 정부 정책은 효과를 내고 있을까?

외부효과로서 과정상에 발생하는 피해는 임차인에게 전가되고, 이들을 위한 보호 장치는 없다. 외부효과가 더 크다면 성공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주택보급률은 2017년 이미 100%를 넘어섰다. 2020년엔 125%까지 오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난해와 올 5월 두 차례에 걸쳐 수도권 3기 신도시 5곳을 발표했다. 지자체는 ‘건설산업 활성화’와 ‘미분양주택’의 갈림길에서 표류하고 있다. 21세기에도 파이를 키우는 일에만 골몰한다. 반면 전세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 개정안’은 2016년 9월 발의된 채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라고 한다.

그 사이 나의 집에 대한 로망은 현실로부터 더 멀어졌다. 나 이외 60여 명의 다른 임차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근저당과 그 사이 불어난 은행이자를 갚을 돈을 구하지 못한 임차인들은 이제 곧 ‘주택이외의 거처’로 몰락할 것이다. 그들의 안부를 묻기조차 두렵다.

이 정 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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