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활자로드’는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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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활자로드’는 없었나
  • 충청리뷰
  • 승인 2020.02.2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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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마르칸트-러시아-유럽으로 연결되는 초원길 열려 있었어
英 역사학자 허드슨 “구텐베르크는 韓 금속활자 인쇄술 영향 받았을 것”

 

동서 문명교류의 상징인 실크로드(Silk Road), 듣기만 해도 한 번쯤은 꼭 여행하고 싶은 길이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도자기, 향료, 차 등 여러 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경제·문화를 이어 준 교통로를 총칭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약 6,400㎞에 달하는 이 길은 고대부터 존재하였으나, 1877년에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으로 명명하였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종이와 목판 인쇄술도 14세기 말에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면 한국에서 발명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활자로드의 명명과 최초 탐사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청주MBC(현 MBC충북)의 제안을 받아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양 전파에 대해 탐사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는 것을 공동기획하였다. 그리고 필자와 남윤성 청주MBC PD가 실무를 맡아서 진행하기로 하고, 공동 연구와 원활한 회의를 위해 고인쇄박물관에 제작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중국의 실크로드에 비견하여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가 구텐베르크에게 전파된 길을 활자로드(Type Road)라 명명하고, 그 존재 여부를 세계 최초로 탐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는 물론 진척된 연구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제작진과 함께 국내외의 연구자료를 찾아 번역하여 읽고 토론하며 밤을 자주 새웠다.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비단길), 스텝 로드(초원길), 해상 실크로드(바닷길) 등 동서를 넘나들며 방대한 역사를 살핌과 동시에 우리의 대외 교류사와 계속 연결시켜 나갔다.

11개국에 대한 해외 취재와 국내 취재를 마치고 2년만인 2003년 12월에 “세상을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 2부작(1부 : 구텐베르크는 발명가인가?, 2부 : 활자로드는 없는가?)을 제작, 방송하였다.

활자로드(MBC충북, 세상을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
활자로드(MBC충북, 세상을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

 

동서 교역로는 열려 있었는데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양 전파 가능성에 대해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카터 교수는 <중국 인쇄술과 서방전파>(1925년)에서 구텐베르크는 독자적인 발명보다 외부로부터 어떤 정보를 얻어 인쇄술에 도전했을 것으로 보았다. 중국의 목활자 인쇄술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는 1200년대에 일시 사용되다가 단절된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를 시작한 시기로 볼 때, 조선(15세기 초)으로부터 전파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티무르제국에 의해 실크로드가 폐쇄된 상태였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구텐베르크의 독자적 발명으로 볼 수 밖에 없다며, 결론을 유보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의 역사학자 허드슨은 <유럽과 중국>(1931년)이라는 저서에서 구텐베르크의 독자적 발명일 가능성은 적으며,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영향을 받아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카터 교수는 실크로드의 폐쇄로 인해 한국 금속활자 인쇄술의 서양 전파 가능성 없다고 했는데, 중국→사마르칸트→러시아(노브고로드)→유럽으로 연결되는 초원길이 활발하게 열려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멀리 독일로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탐사한 결과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와 초원길이 모두 열려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동서 교역로가 막혀 전파될 수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구텐베르크 초상화(1584년, A. Thevet의 동판화)
구텐베르크 초상화(1584년, A. Thevet의 동판화)

 

활자 주조방법이 같다면…

미국 프린스턴대 폴 니덤 교수는 구텐베르크 42행성서와 조선 초기 금속활자본을 컴퓨터로 정밀 분석한 결과 한국에서의 금속활자 주조방법과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주조방법이 같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과의 관련성을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내용이 뉴욕타임즈에 ‘역사는 구텐베르크에게 너무 관대하지 않았는가?’라는 기사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2015년에 고인쇄박물관과 사)세계직지문화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흥덕사지 발굴 30주년 기념 직지국제컨퍼런스’에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미술학교 드로뇽 교수는 구텐베르크 당시의 인쇄물에서 실수로 활자가 쓰러진 상태로 인쇄된 흔적을 통해 활자의 모양을 밝힐 수 있는 증거를 찾아 발표하였다.

구텐베르크 활자 모양
구텐베르크 활자 모양

 

그리고 같은 장(쪽)에서 동일 글자의 활자가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하였으며,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인쇄 면을 확대하여 활자가 찍힌 면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요철이 있음을 밝혔다. 이것은 구텐베르크 활자가 패트릭스(어미자)로 매트릭스(아비자)를 만들어 핸드몰드(주조기)로 주조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한 성현의 『용재총화』에 수록된 주물사주조법과 같은 방법으로 주조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즉, 구텐베르크의 활자 주조방법이 한국의 전통활자 주조법과 같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문명의 속성, 자생성과 모방성
문명은 자생성과 모방성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생성은 우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내듯이 자생적으로 여러 가지 실패를 거치고 시간이 경과해서 성공하는 것이고, 모방성은 남의 우수한 것을 따라 배우는 것이다. 모방은 쉽고, 시간적인 낭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 1200년대 초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후 조선 세종 때 ‘갑인자’(1434년)에 이르러 최고조의 기술에 이르렀다. 약 200년에 걸쳐 기술이 점진적으로 개선,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약 10년에 걸쳐 당시 최첨단의 인쇄기술을 선보였다. 이는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 활자
구텐베르크 활자

 

독일의 역사학자 카프르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종이를 자신들의 발명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유럽의 종이가 중국의 제지술에서 기원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자치통감(국가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 복원)
자치통감(국가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 복원)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한다. 그 뿌리는 금속활자 인쇄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이것은 한국이 최초로 근대문명을 불러일으킨 발상지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학계에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활자로드의 실체를 규명하고 정설화한다면, 세계사에서 한국의 위상이 재평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황정하 서원대 교양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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