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환대의 공간이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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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환대의 공간이 돼야
  • 충청리뷰
  • 승인 2020.03.2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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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소득수준·거주지·직업·장애와 관계없이 누구나 누리는 곳

 

차별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차별한다. 성인이 아이를 차별하고, 백인이 유색인을, 정착민이 난민을 차별한다. 후천적 장애인이 선천적 장애인을 차별하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한다. 이쯤 되면 차별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될 지경이다.

차별은 공기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물리적 장소에서 구현될 때 그 잔혹성이 드러난다. 차별당하는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접근할 권리를 박탈한다. 도시에는 외부인을 차단하는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가 늘어간다. ‘노키즈존’이 늘어가고, 군대에서 강제 전역을 당하고, 대학교 입학을 거부당한다. 계층화된 도시의 성벽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도시를 사용하고 접근할 권리를 빼앗는다. 차별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은 없는데, 차별은 만연하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어쩐지 서글프다. 차별하는 사람이 나쁜데 차별받는 사람에게 싸워야 할 짐까지 떠미는 것만 같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 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A가 커뮤니티 사이트에 남긴 글 중 일부다. 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잣대로부터 항상 강자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제법 근사해 보이는 나의 직함 뒤에도 여러 겹의 소수자 정체성이 숨어있다. 주류적인 나도 나고, 소수자적인 나도 나다. 그 뿐인가. 우리 모두는 어린 아이였고, 언젠가 노인이 된다.

모두를 위한 도시
‘도시에 대한 권리’는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주창한 도시 철학이다. 2016년 해비타트Ⅲ 의제로 ‘도시권’과 ‘포용도시’가 채택되면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에 거주하는 누구나 도시를 생산하고, 사용하고, 참여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접근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중에는 ‘다를 수 있는 권리(right to be different)’가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계층적 위치에 따라 욕구가 다르다. 욕구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차이가 발생한다. 다를 수 있는 권리는 이때 기존의 체계로 동질화되거나 분류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분류되지 않을 권리.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분류되지 않고, 남성이 될 필요도 여성이 될 필요도 없이 나로서 존중받을 권리. 거주지 분류에 따른 신조어 휴먼시아 거지 ‘휴거’와 빌라거지 ‘빌거’는 공간적 분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소외와 차별로 이어지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포용도시’라는 세련된 옷을 덧입고 확대되고 있으나, ‘다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의를 제외시킴으로써 차별과 공간적 소외를 막는 일에 짐짓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환대의 권리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장소-환대>에서 환대를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환대는 ‘타자’와 함께 ‘자리를 내어주는 주체’로서의 사람과 ‘자리’로 대변되는 공간을 동시에 묶어낸다.

또한 사람-장소-환대는 서로 연결되어 도시, 사회, 공동체 그 무엇으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접근하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잠그는 게 아니라 초대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일.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줘야 할 우리, 도시, 사회, 공동체의 일이다.

더뎌 보이기는 하지만 도시는 사회적 접근성과 물리적 접근성 모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1886년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1947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시작으로 소외받던 여성의 대학 입학이 허용되었다. 가까이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와 충청북도지사 관사였던 충북문화관과 숲속 갤러리도 개인 점유공간을 공공에게 개방한 좋은 사례다.

많은 도시들이 도로를 보행자도로로 전환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모두를 위한 도시’의 일환이다. 혐오와 차별의 소란이 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곳이 열린 공간, 누구나 접근가능한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도시는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하고, 그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성별, 국적, 소득수준, 거주지, 직업, 성적취향,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일상의 가치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한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다를 수 있는 권리를 넘어 환대할 권리-환대받을 권리를 일상과 도시에 구현하는, 그런 사회는 이미 도래해 있다.

/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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