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꼴랭 드 플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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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꼴랭 드 플랑시
  • 충청리뷰
  • 승인 2020.04.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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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초대 주한프랑스 대리공사로 조선에 부임
직지 포함한 조선 고서 많이 수집해 프랑스로 보내

 

직지는 어디에 소장되어 있을까?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이 어떻게 머나먼 이국땅 프랑스까지 건너간 것일까? 여기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숨겨져 있다. 그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 보고자 한다.

조선 무희와 결혼한 꼴랭 드 플랑시
빅토르 꼴랭 드 플랑시는 프랑스 파리 남동쪽 트르아지방의 플랑시 마을에서 1853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쟈크 꼴랭 드 플랑시는 작가이면서 인쇄출판업에 종사하였다. 아들 플랑시는 성장하면서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동양어대학에서 중국어과를 1877년에 졸업하였다. 이 대학은 19세기 말에 주로 동양에 파견되는 통역관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11년 동안 근무하였다.

1886년 6월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플랑시는 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1887년 4월에 일주일 동안 서울에 체류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프랑스 정부는 플랑시를 초대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다음 해 6월에 부임하여 약 3년 동안 서울에 주재하였다.

그리고 1891년부터 1895년까지 일본에 전속되어 5년간 근무하였으며 1895년 12월에 주한 공사 겸 총영사로 임명되어 1896년 3월부터 재차 서울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1899년부터 1900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주한 프랑스 공사관이 철수하면서 플랑시는 태국 방콕으로 전속되었다. 1907년에 30여 년의 외교관 생활을 마감하였다.

고종이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베푼 연회에서 플랑시는 한 궁중 무희에게 반했다고 한다. 고종이 그녀를 플랑시에게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2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아폴리트 브랑뎅의 저서 <조선에서>에 수록되어 있다.

춤추던 궁중 무희의 이름은 이심이었다. 당시 궁중 무희는 천민으로 플랑시 공사의 청에 따라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그러나 플랑시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교사까지 두고 불어를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원숭이처럼 야위는 등 향수병에 걸리자 플랑시는 그녀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 조선으로 보내 달라고 자청하여 다시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조선을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심이 플랑시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자 프랑스 공사의 부인이 천민 출신이라는 얘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에 이심은 남편 플랑시를 위해 동전을 입에 물고 자결을 한다. 플랑시는 이심이 숨을 거두자 그녀를 그리워하며 홀로 살았다. 따라서 플랑시는 현재 후손이 없다.

이심과 꼴랭 드 플랑시
이심과 꼴랭 드 플랑시

 

플랑시 공사가 한국의 민속품을 구입한다는 소문을 내자 아침 일찍부터 공사관 앞에 물건을 팔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플랑시 공사에게 불어를 배우고 있는 통역관들이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해 주는 일을 맡아 주었다.

상인들은 때로 엄청난 가격을 부르거나, 제의를 거절하곤 하지만 흥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와서 전날 거절했던 조건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통역관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여러 상점을 둘러보며 직접 물건을 구입했다. 당시 조선을 여행한 샤를 바라의 <조선기행>을 통해 플랑시 공사의 일과와 책을 어떻게 수집하였나 짐작해 볼 수 있다.

플랑시 공사는 조선에 근무하면서 특히 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마도 인쇄출판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 후배이자 통역관으로 함께 근무하던 모리스 꾸랑에게 조선의 모든 서적을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서지적인 해제를 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조언도 하였다.

꾸랑은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3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조선서지> 3권을 간행하였다. 플랑시는 1차 부임했을 때 수집한 고서 약 1,500권을 3차례에 걸쳐 모교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꼴랭 드 플랑시
꼴랭 드 플랑시

 

파리 만국박람회와 직지 첫 해외전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독립국으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임을 인정받기 위해 외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가운데 2차로 부임한 플랑시가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한다. 고종은 흔쾌히 참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대한제국은 박람회에 별도의 전시관인 한국관을 설치하고,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언론은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고서 등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이 대한제국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관람객들은 한국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섰다고 한다. 플랑시 공사가 수집하여 전시한 직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역사 예술 고고학 학회지인 <옛날 종이>는 플랑시 개인소유인 직지에 대해 “1377년 한국의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금속활자 인쇄는 독일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한국에서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박람회에 한국관 전시를 담당하였던 꾸랑은 전시회가 끝나고 플랑시가 수집한 고서를 정리하여 <조선서지> 보유편을 간행하였다. 여기에 직지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직지는 플랑시가 2차로 부임한 1896년에서 1899년 사이에 한국에서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플랑시는 파리 만국박람회가 끝나고 한국관 개관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았다.

플랑시는 한국과 프랑스가 국교를 맺은 후 2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약 13년 동안 외교관으로 머물면서 확고한 감식력과 폭넓은 교양으로 한국의 고서 등을 수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집품은 당연히 직지였다. 그는 책 표지에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오래된 한국 책’이라고 친필로 써 놓았다. 그러면 플랑시는 직지를 어떻게 수집하였을까? 다만 우리는 당시의 상황과 단편적인 자료들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 황정하 서원대 교양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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