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뉴딜정책 왜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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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뉴딜정책 왜 나왔을까
  • 충청리뷰
  • 승인 2020.07.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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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대대적 사회 재설계, 한국형 뉴딜 시대정신 담았나

 

미국에서 인터넷을 규제하는 기관은 언제 최초로 생겨났을까? 아마 월드와이드웹이 199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탄생했으니, 1990년대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34년이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인터넷 규제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 Commission, 약자 FCC)가 그 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FCC는 인터넷이 개발되기 훨씬 더 이전에 미국의 라디오 네트워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 뒤 TV로 관할 범위를 확대한 뒤 1990년대에는 마침내 인터넷까지도 다루게 되었다.

FCC가 탄생한 연도가 1934년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해는 1932년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추진하던 ‘뉴딜’ 프로그램이 한창이던 해였기 때문이다. FCC의 설립은 뉴딜의 연장 선상에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들 수가 있다. 뉴딜의 목적인 대공황의 극복과 라디오 통신 규제위원회의 창설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1930년대라는 시대와 그 속에서 뉴딜이 갖는 의미에 대해 폭넓게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1930년대의 시대 상황
1930년대는 익히 알려져 있듯 국제질서의 격변기였다.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아시아에서 제국주의를 확대하고자 했던 일본, 패전을 딛고 부활을 꿈꾸는 독일 같은 국가들이 부상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던 구질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이 국제적 긴장은 1939년에 마침내 더 거대하고 처절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국제적 문제는 늘 그렇듯이 각국의 국내 문제, 특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갈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소련의 위협은 단순히 지정학적 위협을 넘어 각국의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키는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은 이것이 공산주의를 효과적으로 막으면서도 기존 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제3의 길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세계 각지에 이렇게 계급 갈등이 넘실댄 이유는 수십 년 전의 산업과 기술 발전이 만들어낸 파급효과를 구질서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 중공업의 발달, 1880년대 전기와 내연기관의 대중화, 컨베이어 벨트의 등장을 통한 대규모 공장과 노동자 집단 형성, 기업 및 국가 조직의 팽창과 관리직의 부상, 유무선 통신 기술 발전 등이 정신을 차리기 힘든 속도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변화들은 당시 지구적으로 활동하며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하던 민간 자본가들이 주도하던 질서를 이미 흔들고 있었다. 기술적 숙련도를 갖춘 대규모 노동자 집단은 파업을 통해 자본가를 위협할 수 있었고, 야심에 찬 관료, 지식인, 혁명가들은 국가 권력을 통해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하고자 하는 이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구질서의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자원을 생산, 동원해야 승리할 수 있던 총력전은 국가 기구의 대대적 확장,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를 불러왔다. 여기에 전쟁이 파괴한 기존의 금융과 무역 질서가 끝내 복구가 되지 않고 1929년 대공황으로 최종적으로 붕괴하자 과거 자유주의 질서는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과 한국의 뉴딜이 다른 점
뉴딜은 이런 혼란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기술과 생산체제에 어울리는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를 건설하고자 한 미국적 기획이었다. 소련, 독일, 일본 등의 국가도 같은 맥락에서 각자의 기획을 펼쳐나가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중요한 공통점들은 있었다. 계획 혹은 규제를 통한 국가의 경제개입 확대, 그 수행자로서 관리직의 권한 확대, 노동자들의 권리 인정을 통한 사회안정 추구와 현대적 생산 시스템 도입 등이 그것이었다. 뉴딜의 상징으로 가장 유명한 테네시강 개발공사(TVA)는 그렇기에 단순히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한 공공근로 시스템 이상의 의미가 있던 사업이었다.

뉴딜 기획가들은 합리적 기획을 통해 전기라는 새 시대의 상징을 낙후지역에 공급해 국가의 현대화를 달성하고자 TVA를 추진했다. 서두에 언급한 FCC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미디어 생활을 뒤바꿀 라디오라는 새로운 혁신을 어떻게 공동체에 적합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이 FCC였다. 그리고 FCC가 TV를 거쳐 인터넷까지 다루게 된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정착한 ‘새로운 사회계약’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기본적 규칙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선언한 한국형 뉴딜이 점점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정부가 제시한 키워드는 ‘디지털’과 ‘환경’인 것 같다. 이 같은 선도적인 모습은 분명 반갑지만, 정말 1930년대의 ‘뉴딜’을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술과 산업의 급변에 적응하기 위한 대대적 사회 재설계가 뉴딜의 본질이라 할 때, ‘한국형 뉴딜’은 그런 시대정신을 짚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다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형 뉴딜이 단순히 1930년대의 해법을 반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려면, 진정 중요한 것은 지금의 세계가 1930년대나 1970년대 같은 시기와 무엇이 다른지 파악할 수 있는 위치감각일지도 모르겠다.

/ 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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