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테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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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테스형!
  • 한덕현
  • 승인 2020.10.0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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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처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당장 ‘테스’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과연 그가 누구이길래 가왕 나훈아가 그토록 정신적인 구원을 반복적으로 애원할까? 한데 테스형이 소크라테스라는 게 아닌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요즘 말로 빵터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훈아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그의 노래가사나 언행은 늘 의표를 찔렀고 대중들을 환호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나 논리를 부여하는 건 큰 착각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밑바닥 정서를 참 자연스럽게 자극한다. 그의 히트곡 가사들을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대중들의 원초적인 감상에 어필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나훈아와 그의 노래는 소위 고상한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는 세련미나 품위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어떤 이는 천박하다고까지 혹평한다.

실제로 그가 노래하는 중간중간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하고 웃는 모습,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줬듯이 은근히 상체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도 많이 느끼하게 다가온다. 그래도 밉지가 않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그저 노래로만 들으면 그는 분명 대한민국의 최고 뮤지션이다. 추석연휴 황금시간대에 시청률 29%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국민 열명 중에 세 사람이 동시간대에 나훈아에 열광했다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훈아의 공연 일시를 일찌감치 카톡 일정에 메모해뒀다가 차질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TV앞을 고수한 나로서도 ‘대한민국 어게인’을 합창하며 모처럼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공연이 끝나고선 몇몇지인이 유튜브 음원을 카톡으로 보내줘 리듬과 가사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요 며칠동안엔 일하다가 “아, 테스형~”을 읊조리고 길을 걷다가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를 소리높여 부르기 일쑤다. 원래 나훈아를 좋아하지만 ‘테스형’은 더 감칠맛이 난다.

그러니 올해 추석 민심을 견인한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여야도 아니고 추미애도 아니었다. 나훈아와 그가 부른 테스형이었고 그의 소신발언이라는 공연중 멘트였다. “옛날 역사책을 보면 제가 살아오는 동안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KBS는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수가 없다.”

이 말들은 듣는 이의 가슴에 콕 콕 박혔다. 논리와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 이처럼 단문의 수사(修辭)가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는 대단하다. 그 것이 당대의 시류나 여론과 맞물리게 되면 폭발력은 더 세어진다. 공연 이후 여야가 나훈아의 말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또 다른 정쟁을 일으키는 배경엔 바로 이런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 사진=KBS2 방송 캡처
/ 사진=KBS2 방송 캡처

 

하지만 이같은 마법의 단문은 순간 배설의 쾌감은 일으킬지언정 지속적인 감동은 주지 못한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어록이 좋은 예다. 듣는 순간 하나같이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해 냈을까” 하며 무릎을 탁 치게 하지만 그 감흥은 오래가지 않는다. 표피적인 것의 한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른바 툭 치고 빠지는 단문의 논평으로 재미를 보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막말이나 본인의 품위훼손으로 귀결된다. 학자들은 이같은 사례를 대중선동의 심리학 차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가수중에서도 자기주장이 특히 강하다는 나훈아는 가장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역설을 공연을 빌려 시연한 거나 다름없다. 뜬금없이 지구상의 철인 소크라테스를 자신만의 테스형으로 둔갑시키고, 그저 노래를 부르며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정치권과 국민들이 난리를 쳤다. 그가 노태우 시절 총선 후보 제의를 거부하고 삼성 이건희의 생일상 초대를 일언지하에 물렸는가 하면, 일본 공연 때 쾌지나칭칭 가사에 ‘독도는 우리 땅’을 붙여 크게 외칠 당시에도 자신은 딴따라임을 자처하며 가장 비정치적인 언사로 대중들에게 울림을 안겼다. 나는 가수 이기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고, 내 노래를 들으려면 표를 사서 공연장으로 와야 하며, (일본인이) 나를 죽이겠다면 내가 먼저 ‘죽여삐리겠다’고 즉석의 말로 응대했지만 파장은 컸다. 이보다 더한 정치적인 션세이션도 없었다.

결국 이번 공연에서의 나훈아 발언은 상당히 계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중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려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내용은 조금도 틀리지 않다. 그의 자괴처럼 왕과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던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물론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전장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 왕들은 더러 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적어도 나훈아가 태어나서 추석 공연을 할 때까지는 이런 지도자들이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 국민들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지도자는 커녕 통치를 앞세워 자기국민에 대한 국가폭력으로 무수한 양민들을 학살한 지도자를 여럿 경험했다.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반공법으로 죽이고 국보법으로 죽이고 내란죄로 죽이고 사상범으로 몰아 죽이고 참 많이도 도륙했다. 그들에겐 스탈린의 말처럼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보수가 죽도록 싫어하는 진보정권의 단 한 가지 장점을 적시한다면 이러한 국가폭력이 사라졌다는 것. 지금 코로나를 이유로 광화문 집회를 원천 봉쇄하는 건 보수에게 빌미를 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선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없다.

어디 KBS 뿐이겠는가. 우리나라 언론이 권력에 비굴하지 않고, 소신을 버리지 않은 적은 없다. 언론만큼 권력을 향해 기회주의적 행태로 명줄을 이어온 곳도 없다. 목하 보수언론들이 정권과 극도로 각을 세우고 있지만, 대통령도 동네 강아지로 취급당하는 민주주의의 호시절을 만나 그럴 뿐이지 그들의 ‘권력 기생’ DNA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가 생길 수 없다는 말도 백번이고 옳다. 나훈아의 말대로 위선의 정치인들이 지금 나라를 좀 먹고 있고 이에 대한 상실감은 진보와 여당에게 더 클 수밖에 없다. 조국, 추미애는 우리나라의 관성적인 특혜문화에 익숙한 가진자와 특권층들의 도덕·양심의 문제이지만 윤미향, 강경화의 경우는 국민에 대한 배신의 문제이다. 국민들은 후자의 둘을 더 용서하지 못한다. 당장 옷을 벗어야 맞다.

많은 사람들이 나훈아에 열광했지만 나는 달리 생각했다. 천하의 나훈아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 관객없는 언택트 공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는 예전에 못 미쳤고 그의 얼굴형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이가 들은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 어떤 것도 영원할 수가 없으니 권력 또한 아니하겠는가. 아~~~~테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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