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직지 국내에 어떻게 알려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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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직지 국내에 어떻게 알려졌을까
  • 충청리뷰
  • 승인 2020.10.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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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책’ 전시회에서 직지 큰 반향 일으켜
신용석 조선일보 파리특파원 국내에 첫 소개, 박병선 박사 사진 제공

 

최근 들어 정부에서는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을 중심으로 해외에 소재한 문화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그 현황과 실태를 조사하며,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는 반환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문화재는 21개국에 약 20만 여점에 이른다고 한다.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도 그 중에 하나이다. 19세기말 이방인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간 직지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프랑스 파리에 본부가 있는 유네스코에서는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지정하였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서는 ‘책’을 주제로 5월 17일부터 10월 말까지 약 6개월 반 동안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BNF가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자료들을 엄선하여 전시하였는데, 그 중에 앙리 베베르의 상속자로부터 기증을 받아 한국자료 109번으로 도서대장에 등록하여 1952년부터 소장하고 있던 직지를 전시한 것이다.(이때 ‘직지심경’이란 약칭을 사용하면서 국내에서도 이 서명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책 전시회 도록(1972)

 

물론 직지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된 바가 있었지만, 유럽 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달랐다. 당시 프랑스 국영TV인 TF1에서는 직지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였다.

프랑스 국영TV의 귀중한 보도
루이 두셰기자는 “사람들은 모두 구텐베르크를 인쇄술의 발명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학교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발명가가 아닙니다. 자 여기(직지가 전시된 것을 보여주며)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서적으로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1377년에 인쇄된 것입니다. 이는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을 추모하는 것 자체를 뭐라 할 수 없지만, 이제 우리는 용기를 내어 금속활자 발명의 영광을 그 주인인 동양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직지가 BNF에서 전시되면서 유럽 사람들이 금속활자의 발명이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것에 대해 커다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국내에 직지의 존재가 언론에 보도된 것은 조선일보 신용석 파리 특파원이 처음이었다. 신용석 특파원은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파리 특파원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술공부를 위해 파리로 유학을 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불어를 전혀 할 줄도 모르면서 파리 특파원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보도된 직지 사진 감정 모습. 왼쪽이 故 박병선 박사
1973년 간행된 직지영인본

 

파리에 근무하면서 사무실도 없고 하여 불어 공부도 할겸 매일같이 BNF로 출근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BNF 동양문헌실 책임자인 마리 로즈 셰귀여사로부터 직지가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 1972년 인터뷰와 함께 기사를 작성하여 외교 행낭으로 보내면서 문화면에 실리겠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흘이 지난 5월 28일자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이에 직지는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6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직지 간기를 포함한 2면(38장 뒷면과 39장 앞면)의 사진이 우송돼 왔다. 따라서 한국과학사학회에서는 7월 1일에 한국의 금속활자라는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김두종, 손보기, 천혜봉, 전상운, 송상용 교수 등 5명이 발표하였는데, 천혜봉 교수는 서지적인 측면에서 사진을 보고 감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직지는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으로 발표하였다.

1972년 금속활자본으로 최종 결론
물론 이때 발표에 참석한 5명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직지에 대한 국내 첫 학술연구 발표였다. 그리고 당시 강주진 국회도서관장은 8월에 BNF를 방문하여 직지가 전시된 모습을 보고 와서 11월에 ‘파리 직지심경을 보고 와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BNF의 전시회가 끝나고 1972년 12월 16일에 박병선 박사가 직지 흑백사진(80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12월 22일 강주진 국회도서관장, 안춘근 을유문화사기획부장, 이겸로 통문관 사장 등 3명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목판본, 목활자본, 금속활자본이라는 각각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12월 28일 오후 5시에 국회도서관장실에서 김두종, 이병도, 유홍렬, 손보기, 천혜봉 교수 등 20여명의 관련 학자들이 모여 약 1시간동안 사진을 세밀히 감정한 결과 김두종 교수가 금속활자본으로 최종 결론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3월에 손보기 교수(직지심경 : 금속활자 고증의 경위와 그 의의)와 천혜봉 교수(고려주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가 직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도협월보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특히 천혜봉 교수는 이 논문에서 직지의 편자인 백운화상과 직지의 내용, 전래 경위, 서지적인 특징 다섯 가지를 들어 금속활자본이 틀림없음을 증명하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프랑스 국립도서관

 

한편 박병선 박사가 가지고 귀국한 흑백사진은 감정이 끝난 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구입하여 그 산하기관인 문화재관리국에서 영인본을 제작하였다. 해제는 천혜봉 교수에게 의뢰하여 국문으로 작성하였고 영어, 독어, 불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국내에서 첫 흑백영인본이 1973년 8월에 완성되었다.

이 영인본은 외국어로 해제본까지 만들었으나, BNF의 정식 허가를 받아 영인본을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외에는 배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도서관과 관련학자들에게 배포되어 직지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주에서 흥덕사의 옛 터를 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황정하 (사)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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