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복수혈전(復讐血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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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복수혈전(復讐血戰)
  • 한덕현
  • 승인 2020.11.0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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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이명박이 재수감되자 보수쪽에선 2년 후를 경고했다. 진보가 다음 대선에서 정권재창출에 실패하면 다시 보수가 보복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사(史)의 불행은 이젠 국민들의 뼛속까지 파고든 이같은 복수문화에 기인한다.

어느덧 대한민국 국가브랜드가 된 ‘권력의 복수혈전’은 이번에도 끝내 이명박이라는 전리품을 취하면서 불행하게도 앞으로의 대통령문화를 또 어둡게 했다. 국민들에게 연평균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강국의 미래를 실은 747 점보기를 선물하겠다던 그의 꿈은 17년 감옥살이로 대체되며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다. 박근혜 이후 다시는 대통령의 불행을 반복하지 말자던 국민적 다짐은 당분간 언급하기조차 어렵게 됐다. 지금 대책없이 표출되는 야당인 국민의힘과 보수쪽의 적개심만 봐도 그렇다. 민주국가에서 보통선거로 선택됐던 대통령이 한꺼번에 두 명씩이나 기약없는 철창생활을 하게 된 현실은 어쨌든 비극이다.

국민들에게 권력보복의 정서를 촉발시킨 단초는 노무현의 서거와 그 후폭풍이었다. 본인은 검찰을 앞세운 이명박의 파렴치한 핍박에 시달리다 투신자살로 절명했고 종국엔 절친인 강금원에까지 한많은 죽음을 안겼다. 당시 노무현 지지자와 민주론자들이 삭힌 분노와 좌절은 말로써 표현하기조차 쉽지 않다. MB의 추락은 이 것들의 궁극적인 현시(顯示)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복수를 갈게 했다. 지금 눈만 뜨면 검찰개혁을 외치지만 우리나라 검찰은 노무현 수사 당시 ‘논두렁시계’를 조작해 공소장에 넣는 순간 사실상 사형선고를 재촉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직 당사자 이인규는 반성이나 사과가 없다.

물론 이명박 정권 이전에도 전직 대통령의 비극은 늘 있어왔지만 그렇더라도 민심에 의한 변고였지 후임 권력의 집요한 탄압 때문은 아니었다. 이승만 하야, 박정희 저격, 전두환 노태우 감옥행은 국민들의 명령이었지 결코 다음 권력의 복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명박에 의한 노무현의 죽음 그리고 부정축재, 이를 떠올린다면 MB의 재수감은 사실 동정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인과응보인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권의 역사는 기막히게도 민주국가에서 권력의 암(癌)이라는 악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역대정권은 예외없이 ①국민적 증오의 결과물이었고 ②선거때는 필히 우상화가 작동했는가 하면, ③선거의 아름다움이라는 승자의 아량과 패자의 승복이 없이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결국엔 추하게 무너지는 꼴을 반복한 것이다. 국민들이 국가의 주인과 주체로서 작동하는데 너무 서투른 탓으로, 이 것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아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한 과오의 업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후임 정권이 전 정권에 대해 보복을 안 한 것은 DJ가 유일했지만 이 전통도 두 번을 넘기지 못하고 이명박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다.

사가들 중엔 ‘증오의 미학(美學)’을 설파해 종종 논란을 빚는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그 증오가 또 다른 증오를 낳으며 역사는 발전, 되풀이 된다는 논리다. 독재를 증오해 민주혁명을 성취하고 부패와 수구를 증오해 개혁을 이룬다면야 증오야말로 사회발전의 획기적 요체가 되겠지만 문제는 증오는 반 인간, 반 이성의 감정을 우선 앞세운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싸가지 없는 진보’의 저자 강준만은 대한민국 증오정치의 기원은 감정독재, 자기만의 확증편향에 있다고 단정했다. 증오는 그저 증오일 뿐이고 악(惡)인 것이다. 증오에 의한 잔인한 승리는 반드시 잔인한 권력을 만들었고 그 권력은 다시 잔인한 증오에 의해 무너진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재수감되는 이명박 전 대통령. /뉴시스
재수감되는 이명박 전 대통령. /뉴시스

 

자신을 신임한 정권에 맞서는 윤석열이 졸지에 대권지지도 3위로 올랐다. 보수언론은 노래 테스형을 부른 나훈아와 윤석열을 아예 난세의 두 형님!으로까지 미화하며 여론을 부추기는데 혈안이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훈아가 현 정권에 대해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고 또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나훈아는 이제 은퇴를 고민해야할 고령의 가수일 뿐이고 윤석열은 ‘검찰’이라는 잘 정비된 조직속에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할 임명직 공무원일 뿐이다.

이들의 한 마디, 한 행동이 지금처럼 평가되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우상화에 매몰되는 속성의 대중 우민화(愚民化)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특히 윤석열은 경쟁력있는 후보에 목말라하는 국민의힘에 의해 창졸간에 우상화의 대상이 되었다. 오죽하면 장제원이 우리의 여왕벌이 강림했다고 호들갑을 떨었겠는가. 안 된 얘기이지만 아직까지는 졸지에 난국의 구세주로 떠받쳐지다가 한 방에 무대뒤로 사라진 고건 안철수 황교안의 데자뷰를 보는 것같아 안타깝다.

우상화로 태동한 권력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멀게는 후세인과 카다피가 그렇고 가깝게는 박근혜 이명박이 그렇다. 윤석열이 진보의 정권 재창출에 브릿지가 될 것이라는 평가는 이래서 나온다. 그에게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제발 하루라도 빨리 정치권으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끝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정치적 중립을 본인의 차별화된 소신으로 내세우는 그가 현 정권에 맞서는 대선후보로 부상하고 또 임기를 다하겠다는 것도 한 마디로 코미디다. 진정 정치에 뜻이 있다면 더 늦기전에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옳다. 칼잡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그가 모든 국민을 껴안아야할 국가리더에 과연 적합한 인물인지도 한번 냉정하게 따져볼 일이다.

승자의 아량과 패자의 승복이 없는 것도 우리나라 정권사의 어두운 그늘이다. 일단 승자가 되면 모든 것을 독식하려 하고 패자는 자신들의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복수만을 노린다. 이 것이 권력의 속성임을 백번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이런 차원을 넘어선다. 상대는 파트너가 아니라 반드시 죽이고 죽어여할 원수가 됐다. 그러니 진영으로 딱 갈리는 국민들의 정서적 황폐함 또한 이젠 막장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막가파 트럼프로 인해 마구잡이로 변질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보노라면 이를 실감하고도 남는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최고 선진국은 커녕 최악의 미개국가로 떨어지기 직전인 듯싶다.

많은 국민들은 더 이상 전임 대통령의 감옥행을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런 전통을 곧추세워야 하고 이를 위해선 본인의 희생도 감수하려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사면도 한 가지 방안일 수 있다. 국가통치라는 행위는 실정법의 획일적인 잣대로만 모든 게 재단될 수 없다. 물론 국민들에게 죽을죄를 짓는 경우는 얘기가 달라지지만 말이다.

산 권력에 의한 죽은 권력의 참수, 이 것이 근절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어차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E.H 카) 그러니 다음번 국가지도자는 이같은 대화에 능통한 자의 몫이지 결코, 상대를 죽여야 인정받는 칼잡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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