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수꾼' 도시라는 파수꾼을 기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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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도시라는 파수꾼을 기대함
  • 충청리뷰
  • 승인 2020.11.0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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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고등학교 세 친구의 우정과 균열과 비극적 파국을 그린 영화다. 청소년기의 첫 번째 파수꾼은 친구다. 기태와 희준과 동윤도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한다. 그러나 문제를 제대로 마주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시절에는 작은 오해에도 관계가 쉽게 단절된다.

두 번째 파수꾼은 부모다. 부모는 자식이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부단히 채워주는 존재다. 그러나 부모도 마음을 전달하는 일에 여전히 서투를 수 있다. 그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도 있고,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부모도 있다. 친구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부모의 역할이 부재한 상황에서 제3의 파수꾼은 누가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공간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람은 변화한다. 영화의 배경은 단순하다. 아파트, 학교, 폐역사가 거의 전부다. 일상에서 우리는 특정 공간들을 반복적으로 이동하며 살듯이 영화도 세 공간을 순환한다. 그리고 이 세 공간 모두 황량함이 지배적 정서다.

영화'파수꾼'포스터
영화 '파수꾼' 포스터. /다음

 

황량한 공간들
아파트는 같은 모듈의 공간들이 같은 배열로 결합된 건축물이다. 군대나 교도소와 유사하다. 특징 없는 직사면체다. 외관도 획일적이고, 평면도 획일적이다. 동일한 공간 구조에서는 공간의 쓰임도, 동선도, 활동도 유사해진다.

저녁 8시, 아파트 거주민들 모두 같은 위치에 놓인 소파에 앉아 같은 위치에 걸린 TV를 시청한다. 수직의 위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자본이 디자인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잃었다. 영화는 안산, 잠원, 일산, 반포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찍었다고 한다. 모두 다른 장소지만 한 동네 같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풍경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여 사회에 배출하는 게 목적이다. 창의적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이 창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는 가장 획일적이고, 가장 저렴한 건축물이다. 싸게 지으려다보니 획일적일 수밖에 없다. 2017년 ‘교사 신축공사 관련 시설단가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학교시설물의 ㎡당 평균 건축단가가 155만원이라고 한다. 교정시설은 194만원, 주차시설은 199만원이다.

학교 건물보다 공사비가 낮은 것은 창고 112만원 뿐이다. 건축단가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어떻게 다루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획일함을 강조하는 억압적인 학교와 아파트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이 과연 어떤 다른 에너지를 품을 수 있을까.

학교와 아파트 이외에 이들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은 폐역사다. 학교와 아파트를 벗어나 소년들이 찾은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 있는 사이 공간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그러나 폐역사는 버려져 황폐화 된, 물리적으로는 디스토피아다. 어떤 쓸모도 없이 길게 놓여진 폐철길은 자신의 위치와 미래가 어디쯤인지 가늠되지 않는 소년들의 현재를 닮았다. 도시라는 폐허 속에 내 던져진 상태, 청소년들이 서 있는 그 곳은 온통 회색이다.

기태에게 폐역사 대신 다른 헤테로토피아가 있었다면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잠시 놓아두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 작가 이슬아는 말한다. “눈 뜨자마자 소풍 가는 기분으로 책이랑 노트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주로 커다란 소나무와 감나무가 보이는 카페다. 구경할 사람도 없고 엿들을 대화도 없는 이 아침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책을 읽는 것이다”

영화'파수꾼' 화면 갈무리
영화 '파수꾼' 화면 갈무리. /다음

 

파수꾼 없는 세상의 파수꾼을 위한
최근 나의 헤테로토피아는 베란다다. 화분을 들여놓고, 작은 테이블과 캠핑의자를 놓았다. 주말이면 이 곳에서 아침을 먹고, 햇빛을 쐬며 책을 읽고, 매일매일 자라는 로즈마리와 아이비를 관찰한다.

제3의 파수꾼이 없는 암울한 사회에 살고 있다. 친구와 가족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무료와 분노를 견딜 수 있는 저마다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곳은 베란다나 다락방일 수 있고, 또 걸어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카페, 공원, 도서관, 체육시설, 하천, 골목길일 수도 있다.

획일적인 공간들에 맞서 본연의 형태와 외관과 분위기와 쓸모를 가진 공간. 제3의 파수꾼일 수 있는 누군가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이 하나씩 있다면 도시가 제3의 파수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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