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수의 메아리] 음성군은 양촌선생을 발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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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수의 메아리] 음성군은 양촌선생을 발굴하라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0.11.19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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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수 취재국장
김천수 취재국장

초등학교 6년 동안 3번 정도 권근 삼대묘로 소풍을 다녀온 것으로 기억된다. 3학년 때였던가, 그곳으로 소풍을 가서 기념으로 찍은 것이 가장 어렸을 적 사진이다.

“능안으로 소풍간다”는 말을 듣던, 늘 능안으로 불리던 곳이 권근 삼대묘다. 사실 당시에는 누구의 묘인지 잘 몰랐지만 층층이 높은 산소들이 왕족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이었다.

검버섯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당시에는 석물에 새겨진 글을 읽기도 어려웠다. 지금은 글의 내용을 석물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어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시절이다.

음성군은 타 지자체와 비교해 관광자원이 일천한 것으로 인식된다. 깊은 산림도 변변치 못하고 강도 하나 없어 자연 풍광도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문화유적지 또한 그렇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충청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과 관련한 취재 과정에서 권근(양촌) 선생에 대한 자료를 따라 인터넷 바다로 깊이깊이 빨려 들어갔다. 엄청난 분량의 자료는 제목만 따라 다니기도 바빴다.

그와 연계된 안동권씨의 가계도에 따른 역사도 사료가치가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촌집(陽村集)에 들어있는 자료와 작품, 그 외의 저작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당대의 정몽주, 정도전 등에 가려서일까. 전문가들의 연구와 평가가 적지 않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성과를 현대에 적용해 활용할 점이 무진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양촌은 고려 공민왕 1년부터 조선 태종 9년까지 57세를 일기로 능안마을에 영면에 들었다. 세상이 뒤집히는 역경의 시대에 문인으로, 신하로, 선비로서 다양한 관직을 지냈다. 정도전과 대립도 했고, 반면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는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사절 역할도 톡톡히 해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연구서도 꽤 있다. 도광순의 ‘권양촌사상의 연구’, 박천규의 ‘양촌권근연구’와 ‘권양촌의 응제시와 대명외교’ 등이 있다. 무엇보다 권근의 성리학 등 유교 학문의 업적은 후대인 16세기 후반 이황과 이이 등 일군 학자들 연구의 중심주제가 됐다

아울러 삼대묘에는 권근과 그의 아들 권제, 그의 손자 권람이 함께 모셔져 있다. 권근이 충주에서 기거했다는 기록도 있고, 안동권씨 집성촌인 소이면 갑산리에는 권제를 영원히 기리고 모시는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권제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문신 겸 학자로 ‘용비어천가’를 지은 인물이다.

양촌과 그의 스승인 이색, 그의 가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줄줄이 이어져 있다. 궁궐과 서원, 연계된 수많은 역사 스토리가 엮어져 나온다. 음성군은 그동안 등하불명(燈下不明)이었다. ‘양촌서원’을 세워 정식 운영하거나 체험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할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자체 학습과 연구가 우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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