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 ‘벽화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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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리스본 ‘벽화의 쓸모’
  • 충청리뷰
  • 승인 2020.12.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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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카밀라 왓슨의 동네 노인 시리즈가 벽화로 승화, 그러나 우리는?

 

포르투갈 리스본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의 가파른 골목은 정상을 향해 굽이돌고, 그 끝에 성이 자리한다. 테라코타 지붕의 파스텔 건물들은 우아하나, 관리가 되지 않아 우중충하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리스본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세상 끝으로 밀려났다. 화려한 발코니 장식에서 과거의 영광을 짐작만 할 뿐이다.

과거 무어인들의 궁전이었고, 리스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상 조르즈성을 가기 위해서는 모우라리아(Mouraria) 지구를 거쳐야 한다. 성 근처 중세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지만, 패리냐스 골목(Beco das Farinhas)을 발견하기는 쉽다. 한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걷는 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거리 예술이 이 곳에 있다.

전시회 ‘에이 컨트리뷰션(A Contribution)’
자갈이 깔린 가파른 골목에 건물이 빼곡하다. 어떤 벽은 칠이 벗겨지고, 간혹 새로 칠한 벽도 있다. 언덕이 만드는 그림자가 깊다. 리스본은 많은 이유로 사진 찍기에 좋다. 테라코타 지붕들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는 도시 경관도 아름답지만, 건축 자재로 쓰인 석회석은 가볍고 자연반사가 많아 빛을 담아내기 좋다. 강과 바다로 인한 습기도 빛의 반영에 유리하다. 그래서일까. 영국 출신의 사진작가 카밀라 왓슨(Camilla Watson)은 몇 년간 리스본에 살면서 동네 노인들의 모습을 찍고 그들이 사는 집 외벽에 그 사진을 걸었다.

카밀라 왓슨의 사진이 걸려 있는 리스본 패리냐스 골목 벽
카밀라 왓슨의 사진이 걸려 있는 리스본 패리냐스 골목 벽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피사체가 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면 카밀라 왓슨은 그 사진을 인쇄한다. 사진들은 나무에 인쇄되거나 실버 젤라토 에멀전을 사용하여 벽에 직접 인쇄된다. 골목 그 자체로 전시장이다. 노인 거주자들의 사진 시리즈인 이 전시회의 제목은 ‘에이 컨트리뷰션(A Contribute)’다. 우리말로 ‘공헌’ 또는 ‘기여’를 의미한다. 터를 지키며 살아온 노인들에 대한 찬사가 아닐까.

벽, 역사를 말하다
사진에는 노인들의 일상이 담겨있다. 거리를 걷고, 동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앞치마를 두른 채 문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년 시작된 전시회는 매년 이미지가 추가되면서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리스본시는 이 전시회를 영구화하기로 결정했다. 노인들은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왜 노인일까? ‘2020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포르투갈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전 세계 3위에 이른다. 1위는 일본이고 2위는 이탈리아다.

리스본의 원도심인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노인이 많이 거주한다. 사람은 늙고 건축물은 손을 대지 않아 허물어져간다. 노인과 벽이 닮아있다. 노인과 벽이 방문객을 맞는다. 먼저 웃으며 말없는 인사를 건넨다. 방문객은 이 골목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 알아가며 장소를 더 잘 이해한다. 벽이 장소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래피티, 도시를 갤러리로 만들다
모우라리아나 알파마 지구와 같은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버려진 건물들이 많다. 리스본은 무너지는 도시의 유산들을 개발업자들에게 넘기는 대신 예술가들에게 맡겼다. 버려진 건물을 예술가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시작된 그래피티 아트 컬렉션 ‘크로노 리스보아(crono lisboa)’ 프로젝트다. 그래피티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될 수 있으나, 관점에 따라서 도시에 색과 메시지를 입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리스본은 그래피티를 지워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도시자산으로 적극 받아들인 것이다.

우선 샤브레가스 지역을 그래피티 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그래피티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다양한 지역의 예술가들이 버려진 건물들을 캠퍼스 삼아 대담한 거리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리스본 문화예술단체 ‘라타65(LATA65)’는 65세 이상 노인들과 ‘시니어 그래피티 워크숍’을 진행한다. 펑키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스프레이를 뿌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이들이 그린 그래피티가 골목을 또 하나의 갤러리로 만들고 있다. 버려진 건물들이 근사한 작품이 되고, 우중충했던 건물들이 새 옷을 입고 보행자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떤 벽화일 것인가
한국에서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벽화는 전국적인 문화현상이 되었다. 지금도 공공미술프로젝트나 도시재생 프로그램으로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퇴물 같다. 지역 주민의 삶과 동떨어지고, 지역 특성도 반영이 안 되고, 아무 고민도 없이, 재미와도 무관하며, 무엇보다 아름답지 않아서이다.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의 삶은 방해받고, 흥미 없는 벽화마을이 관광을 활성화할 것도 요원해 보인다. 획일화된 벽화보다 새로 칠한 하얀색 벽이 오히려 참신할 수 있다.

리스본 도시 산책은 도시 벽화의 다른 예를 제시한다. 갤러리를 뛰쳐나온 거리 예술이 어떻게 지역 주민들의 삶에 닿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 도시는 어떻게 다양한 주체들을 초대하고 참여시키는 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지를 근사하게 전시한다.

/ 이정민 청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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