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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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덕현
  • 승인 2020.12.3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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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사회적으로 큰 이슈 혹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 때마다 늘 겪는 현상이지만 이번 법원의 윤석열 판결도 예외가 아니다.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고 현 정권 지지자들은 큰 상실감을 숨기지 못했다. 한 때 유행하던 멘탈 붕괴, ‘멘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한 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력감을 떨치지 못한다. 판결 이후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는 이도 있고 누구는 사람만남을 기피하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판결에 대해 드러내 놓고 얘기할 것도 없고 또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 그리하여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는 건 숨기지 못하겠다. 뜬금없이 국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부터 개인과 대중, 3권분립과 민주주의, 이성과 편견, 특권과 사회, 법논리와 인간, 조직과 자아 사이의 관계 등등 언뜻 언뜻 떠오르는 잡념들로 인해 참으로 혼란스러운 며칠이었다. 그나마 에라잇~! 하는 심정으로 내쳐 달려간 짱둥어해수욕장에서 모처럼 위로를 받았으니 코로나블루 속에서도 잠깐의 소확행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끝내 아쉬운 것은, 당초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며 오랫동안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검찰권력에 대한 손질이 필요하다는데 국민적 공감이 있었고 이 때문에 여야가 한 목소리를 냈던 검찰개혁 문제가 왜 엉뚱하게도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흐르고, 이 와중에 ‘공무원 윤석열’을 시나브로 강력한 대권후보로 키웠느냐는 자책이다. 더군다나 검찰개혁 못지 않게 사법개혁을 외치던 사람들이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쪼르르 법원으로 달려가 생사여탈권을 내맡기고선 그 결과를 놓고 또 삿대질을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멘붕도 없겠다.

아주 오래전에도 인류는 '정신의 붕괴'라는 것을 지구촌 현상으로 경험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에밀 뒤르켐이 주창해 횡행한 아노미(anomie)다. 굳게 믿었던 가치관이 붕괴되고 목적의식이나 이상의 상실로 나타나는 혼돈상태인 '아노미'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대변했지만 속내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치의 동요 그리고 이로 인한 개인의 인식과 사회응집력의 상실이었다. 요즘들어 갑자기 엄습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의문이다. 추미애-윤석열 파동으로 난데없이 모든 게 오로지 법논리로만 재단되고 있으니 법을 잘 모르는, 특히 인간됨과 상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작금의 시국이 두렵기만 하다. ‘법 위에 상식’이라는 말은 이제 아주 몰상식한 금언이 됐다.

신안 증도 짱둥어해수욕장
신안 증도 짱둥어해수욕장

 

권력이나 권위가 이른바 신비주의로 만들어지면 그 폐해는 실로 크다. 실체는 간과된 채 한낱 이미지로 시대의 영웅이 되고 또 그 당사자들이 그런 분위기를 즐기면서 힘을 얻는다면 그 생명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실패가 그렇고 기껏 검찰개혁을 정권의 최고 과제로 삼고서도 이를 조국-윤석열, 추미애-윤석열의 대결로 몰고가 하릴없이 방치하다가 종국엔 국민들이 위임한 대통령 인사권까지 일개 판사에게 상납한 문재인 대통령도 아직까지는(?)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이런 점에서 윤석열을 대권주자로 인정하지 못한다. 국민들은 더 이상 신비주의적 허구로 만들어진 권위가 결국엔 허구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

칼 막스 등 역사를 ‘필연법칙’으로 해석하려 한 실증주의자들은 “우연은 다른 사건과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다”면서 ‘우연’은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구축해 필연성을 찾으려던 사가들에게는 이런 논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역사는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이라는 것이다. 근대사에서 이를 대표한 인물이 슈테판 츠바이크다. 그는 인류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들의 생애를 소설처럼 엮어 ‘역사를 바꾼 굵직한 사건들을 좌우한 것은 아주 작은 선택이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화두를 남겼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운동을 좋아하던 전두환이 군인이 아닌 축구나 럭비선수를 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는 비유가 좋은 예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연, 촛불시위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대통령이 졸지에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로 매도되고, 집권여당의 신임으로 검찰총장이 된 윤석열이 가장 강력한 야권의 대권후보가 된 지금의 ‘우연’이 과연 어떤 필연의 역사를 가져올지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도 좋고 검찰, 사법개혁도 좋지만 정작 국민들은 자꾸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보다도 더 혐오스러운 그들, 결국엔 인간의 문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삶에 아주 드물게만 내려오는 위대한 순간은 이를 장악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모질게 복수한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소름이 돋는 얘기다.

2020년을 보내면서 끝내 털어버리지 못하는 게 있다. 어느덧 굳어질대로 굳어진 국민들의 확증편향과 도그마에 대한 우려다. 강준만의 말처럼 진영논리와 스마트폰에 매몰되는 것도 부족해 상대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감정독재가 온 나라를 지배한다. 가족들의 밥상머리에서조차 좌빨이니 꼴통이니 하며 으르렁대는 게 요즘 세태다. 그러면서 서로 증오를 키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그 증오가 또다른 증오를 낳으며 역사는 발전한다고 증오의 미학(美學)을 부르짖는 이도 있지만 이는 허구다. 증오는 악일 뿐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남을 증오하고 미워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신영복은 ‘함께 맞는 비’를 간절하게 설파하다 갔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다. 우산을 씌워주는 것은 가진 자의 시혜이지만 비를 함께 맞는다는 건 이보다 더 소중한 교감이 된다. 감동 말이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는 공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최고의 가치가 아니겠는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버거울 때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외치라고 했다. 필연적 운명을 긍정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여 순응하는 것, 이럴 때만이 인간이 가장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한다고 했다. 고통과 상실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삶의 태도,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며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코로나로 점철된 올해를 이렇게 보내려 한다. 아듀~~~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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