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강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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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강을 찾아라!
  • 권영석 기자
  • 승인 2021.01.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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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계속되는 지역 정체성 찾기 운동 확산
“미호천 이름은 일제 잔재, 이제 자치단체도 나서야”
미호천.
미호천.

 

연초가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류귀현 씨(81· 청주물류터미널 회장)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미호강 찾기 운동을 주도해 온 그는 새해가 되자 고삐를 더욱 당기고 있다. 국회 이전을 비롯한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을 위한 국가정책들이 하나 둘 진척되면서 충청권이 그야말로 신수도권으로 도약하기 위한 움직임을 가시화하자 충북이 이런 대세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에서다. 그 키워드를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강(江)으로 삼았고 이를 구체화한 것이 미호강 찾기 운동이다.

류 회장 자신이 세운 운초문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민간운동 차원으로 추진돼온 미호강 찾기운동은 새해를 기점으로 지역사회에 공론화를 넓히기 시작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17일 청주시의회에서 각계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해 많은 도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데 이어 지역 일간지 충북일보가 올해 신년호에 ‘미호강’이라는 의제를 화두로 던지면서 미호강 찾기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금강의 최대 지류인 현재의 미호천(美湖川)은 음성군 삼성면 망이산(마이산)에서 발원해 6개 시군 89.2km를 지나 세종시에서 금강과 합류하는 대표적인 금강 수계이다. 유역면적이 1,861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에선 4대강에 이어 5, 6위 권으로 인정받는 대규모 하천이다. 미호천보다 규모가 작은 다른 지역의 많은 하천들이 강(江)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는데도 미호천은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한 단계 아래인 천(川)으로 불리는 것이다.

미호강 찾기 운동을 벌이는 운초문화재단이 천착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전문가를 앞세워 온갖 문헌을 뒤졌고 결과는 분명해졌다. 미호천은 예로부터 불리던 이름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주도로 근대적인 지도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새롭게 붙여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제가 1910년대 초에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벌인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미호천이라는 이름이다. 그 시기는 대략 1912~1914년쯤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왼쪽)와 연기현(지금의 조치원) 지도에는 미호천 하류가 동진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왼쪽)와 연기현(지금의 조치원) 지도에는 미호천 하류가 동진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전에 미호천 명칭은 하천이 지나가는 지역이나 연관 수계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 과거 현감이 주재하던 충북 청안에선 반탄(潘灘), 진천에선 주천(注川) 또는 망천(輞川), 청주에선 작천(鵲川, 까치내), 연기에선 동진강(東津江)으로 불렸다. 당시 일제는 토지조사를 하면서 강토의 정기와 지맥을 끊기 위해 행정 경계를 제멋대로 설정하고 유명 산의 바위나 정상에 쇠말뚝을 박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미호천이라는 이름도 이런 의도로 작명되어 강(江)이 아닌 천(川)으로 격하되었다는 게 미호강 찾기운동의 명분인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게 현재 미호강의 가장 큰 유역과 수역을 차지하는 지점의 이름이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각종 문헌에서 흔들림없이 동진(東津) 내지 동진강(東津江)으로 표기됐다는 점이다.<사진 2> 따라서 미호강 찾기운동은 현재의 미호라는 이름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하천의 위상을 원래의 모습인 강으로 돌려놓자는 취지가 핵심이다.

세종시와 청주권의 오송, 오창 그리고 청주공항과 KTX 오송역으로 상징되는 중부권 시대, 즉 신수도권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미호강의 정립은 필수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안 그러면 지금까지 우려됐던 것처럼 청주는 ‘세종시 블랙홀’의 먹이감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많은 이들의 우려다. 미호강 찾기운동의 가장 궁극적인 요체도 ‘신수권시대 대비’라고 류귀현 이사장은 힘줘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운동은 여전히 민간 차원에 머물러 있다. 청주시의회가 관련 토론회의 장을 마련해주고 박정희 부의장 등 몇 몇 시의원들이 직접 토론에 나서는 등 관심을 갖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청주시와 충북도에선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최근 KTX 세종역 등으로 자치단체간 갈등을 빚은 사례처럼 미호강 찾기운동도 그 파급에 따라선 인접 자치단체와 마찰을 빚을 소지가 있다. 그렇더라도 이 문제는 자치단체가 나서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충북이 더욱 확실한 뿌리를 찾겠다는데 주저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인터뷰/ 류 귀 현 운초문화재단 이사장

“미호강 찾기는 마지막 봉사활동”
하천 규모로 보아 명칭변경 당연, 신수도권시대 대비 의미도

류귀현 운초문화재단 이사장

 

류귀현 이사장이 지난 2016년 사재 5억 원을 들여 운초문화재단을 만들고 매년 운초문화상까지 시상하자 주변에선 “무슨 목적이 있는 것 아냐?”하며 의심하는 눈초리가 많았다. 개인이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부문별 상까지 주는 건 지역에선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다. 그는 원래 부단히 움직여야 힘이 나는 사람이다.

대학을 나와 전매청 공무원을 하다가 물류업에 투신한 이후의 인생역정을 봐도 그렇다. 충북체육회 가맹경기단체 회장, 청주시의회 의원, 청주문화원장, 국제로터리 충북지구(3740)총재, 시인, 서예가, 한국물류터미널 회장 등 등. 그러면서 남이 알아 주든 말든 오지랖이 넓도록 봉사활동도 해 왔다. 자녀 결혼식 땐 축의금을 이웃돕기 성금을 쾌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지난해부턴 누구를 만났다 하면 미호강을 입에 올리자 사람들은 또 생뚱맞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소신은 분명하다. “처음 미호천을 미호강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리카락이 솟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거다 하는 심정으로 전문가들에게 고견을 묻기도 하고 사람들을 내세워 여러 문헌도 살펴봤다. 미호천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 이전에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5년전 운초문화재단 창립 때 “문화융성의 시대를 맞아 문화예술 진흥 및 지역문화 창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사재를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게 됐다”고 취지를 밝혔다. 미호강 찾기운동은 바로 이같은 뜻에 근거하고 여든을 넘긴 본인의 나이를 보아 어찌 보면 지역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새해 들어 더 구체적인 활동과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는 생각에 바짝 조바심이 생긴다는 류 이사장은 요즘엔 일일이 자료까지 만들어 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전국을 다녀봐도 미호천 만한 규모의 하천이 천(川)으로 이름 붙여진 곳은 없다. 꼭 일제잔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미호천은 물을 근원으로 하는 인류 문명사를 보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충청권 신수도권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고 이에 대비하자는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충북과 청주의 입장에선 특히 의미가 크다고 본다. 앞으로 관광활성화를 위해선 미호천의 물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수상 레저나 기반시설 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천(川)이 아닌 강(江)의 이미지를 가져야 모든 것에서 격을 높이게 된다”고 역설했다.

미호강 찾기운동으로 이런 저런 생각과 고민 때문에 최근 밤늦도록 잠을 못자는 날이 많아 부인으로부터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고 질책받는다는 그는 “끝까지 하겠다”는 신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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