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또 다른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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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또 다른 사회학
  • 한덕현
  • 승인 2021.03.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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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아직 습관이 덜된 탓에 마스크를 적당히 쓰고 밖으로 나갈 때마다 어쩔수 없이 주변 눈치를 보게 된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모든 사람들이 정부 방침대로 입과 코를 마스크로 완벽하게 가리고 활동하는 데 익숙해 있다. 동네의 공원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아기들도 얼굴이 거의 덮이도록 마스크를 한 모습을 보면 놀랍기까지 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전 국민을 이렇듯 하나의 똑같은 행동으로 묶을(?) 때가 있었나를 되뇌게 하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쓴 것은 1651년이다. 레비아탄은 구약성서에서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바다 괴물로, 비늘에 덮인 거대한 뱀이나 악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등에는 단단한 돌기가 있고 코에서는 연기를, 입에서는 불을 내뿜는다고 한다. 성서는 레비아탄을 이렇게 서술한다. “땅 위에는 그것과 겨룰 만한 것이 없으며, 그것은 처음부터 겁이 없는 것으로 지음을 받았다. 모든 교만한 것을 우습게 보고, 그 거만한 모든 것 앞에서 왕 노릇을 한다.”

전제군주제를 옹호한 홉스는 국가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이 동물에 비유하며 책을 썼다. 당시 홉스는 영국 내란의 최대 원인은 국가의 주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절대주권을 확립함으로써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달성할 것이라는 확신에서 '리바이어던'을 저술했다고 한다. 한데 냉정하게 따지면 홉스가 예견한 리바이어던은 370년만에 지금 현실로 나타난 꼴이 됐다.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를 마스크 하나로 다스리고 있으니 말이다.

세계 역사에 이만한 절대주권은 없었다. 어떤 전쟁도, 또 어떤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도 지금처럼 세계를 하나의 행동으로 통일시키지는 못했다. 사상의 최고 발명품이라는 종교도 코로나만큼 전 지구를 하나로 엮지는 못한 것이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현 정부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야당이 문재인 정권에 대해 전제주의니 전체주의니 하는 단어를 동원해 이념 공세를 펴는 것은 사실 코로나 정국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코로나 한 방이면 모든 것이 숨죽이며 일시에 통제되거나 조정된다.

백신접종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의 위력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우리를 압박한다. 언택트와 뉴노멀이라는 초유의 인류문화를 만들어냈고 거침없이 확산되는 비대면이라는 파고는 그러잖아도 가속도가 붙던 디지털을 더욱 집약적으로 촉발시켜 어느덧 신인류의 탄생을 실제 눈앞에까지 다가오게 했다. 나같은 아날로그 세대들은 일상에서조차 이미 디지털 난민의 고통을 심각하게 겪게 되면서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닥쳐올지 두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와중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회적 특징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에 의해 모든 국민이 획일적으로 규제받는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확산되는 끼리끼리 문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5인 이상 집합이 금지되는 상황에서 소규모의 끼리끼리 관계는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이 또한 점차 이색 현상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우선 문 밖 출입이 녹록지 않다보니 우리가 오랫동안 유럽의 가족문화라 통칭하며 부러워하던 가장의 일찍 귀가와 가족단위 삶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일각에선 최근에 황혼 이혼이 늘어난 이유로 이를 꼽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현상은 긍정적이다. 문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합금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생각이 축소지향이 되면서 친구를 만나도 끼리끼리, 하찮은 계모임을 해도 끼리끼리, 어디를 놀러가도 아주 친한 소수의 끼리끼리만 한다는 것이다. 어느 땐 저녁 한번 먹으려 해도 누구를 부를지가 고민된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푸념이다. 이러다보니 바쁜 삶 속에서 가뜩이나 만나기 힘들었던 이들은 어느덧 소원해지고 잊혀진다고들 볼멘소리다.

이같은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어떤가? 하고 생각하니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팬데믹 이후에도 쉼없이 사람 만남을 이어왔지만 뻔한 이들만 찾았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누구보다도 시간에 쫓기며 살던 한 지인은 사회적 거리두기 초기엔 그 핑계를 대면서까지 대인접촉을 줄였는데 이젠 아닌 것같다고 걱정까지 한다. 여러 명 모이는 계모임도 쉽지 않고 또 한번 모이면 최하 5명 이상 되는 동호회 모임도 오랫동안 못하다보니 돌연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생경해졌다고 하소연한다.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끼리끼리 문화는 우리사회에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을 초래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끼리끼리 소모임'의 태생적인 유전인자를 타고 났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혈연, 지연, 학연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손만 스쳐도 연줄을 만들려고 한다. 아파트의 같은 통로를 쓴다고 해서 통로계를 만들고 나이가 같다고 해서 동갑계를 조직한다. 같은 달에 임신한 새댁들이 아이계를 만들어 아기용품 등을 공동구매 하기도 한다.

국회의원들은 운동권 출신임을 내세워 배타적인 소그룹을 형성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은 학연 지연 혈연의 연결고리도 부족해 무슨 취미활동과 취향까지 내세워 그들만의 이너서클을 만든다. 이를 통해 서로 어울리며 입신과 사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능력은 퇴근 후 소모임을 얼마나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땡하고 집에 들어가면 무능으로 찍히지만, 소모임을 서 너개 거치면서 먹어라 마셔라 한 후에 귀가하면 능력있고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던 게 코로나 이전의 현실이다. 아침만 먹는 1식(食) 가장은 더 살아도 되는 사람, 아침과 저녁을 먹는 2식 가장은 이제 헤어져야 할 사람, 삼시세끼 다 챙겨 먹는 3식 가장은 아침에 제발 눈을 뜨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농담은 이래서 나왔다.

특히 공직이나 고위직에서의 끼리끼리 문화는 그들만의 리그 즉 뒷거래와 야합, 협잡, 편법의 단초였기에 사회통합을 근본적으로 저해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와 우리들 외엔 모든 게 ‘아니올시다’이고 때문에 정작 우려되는 것은 소모임 문화의 이러한 상대에 대한 냉소와 저주, 배타성이다. 넓게 보면 양 극단으로 갈리는 지금의 국민정서도 이의 부산물일 수 있다.

결국, 결론은 국민 모두가 총체적인 휩쓸림을 강요받는 코로나 시대의 끼리끼리 문화는 우리나라 정서상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 마치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명제처럼 모순된 엇박자를 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앞으로 또 어떤 문화를 잉태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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