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쳐들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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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쳐들면 진다
  • 한덕현
  • 승인 2021.04.1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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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편견인지는 몰라도 정치인 박지원의 최고 장점은 ‘말발’이다. 그가 TV토론에 나오기라도 하면 “오늘은 또 어떤 입담이 터질까?” 은근히 그 타이밍까지 재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 중에 박지원만큼 촌철살인을 잘하는 사람도 없다. 특정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춤형(?) 어휘를 동원하는 순발력으로 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압권은 역시 2년전 4.3보궐선거 직후에 나온 말이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골프와 선거는 고개를 쳐들면 그 순간 진다”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자신이 속한 당이 단 한 석을 건지지 못하게 되자 당시 민주당이 패배한 원인은 오만에 있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골퍼들에겐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고개를 들지 마라’와 ‘힘을 빼라’이다. 필드에 나선 주말 골퍼들에겐 마치 주문(呪文)이나 마법처럼 통하는 말이다. 이를 어기게 되면 대개는, 아니 100% 미스샷이 나오기 때문이다. 쉬운 것 같지만 좀체로 몸에 익숙해지지 않는 게 이 두 가지다. 힘 빼는데 3년 고개 박는데 3년 이라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엊그제 동양인에겐 최초로 그린 재킷을 안긴 마스터즈 골프대회도 실은 이 두 가지 저주로부터 운명이 갈렸다. 15번홀까지 두 타 차이로 선두를달리던 일본 마쓰야마 히데키를 연속 버디로 바짝 좇으며 기세를 올리던 잰더 쇼플리(미국)의 막판 추격은 거침이 없었다. 그가 파3 16번홀에서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승부수. 그린 바로 앞에는 물이, 옆에는 벙커가 도사리고 있는데다 그린 빠르기도 엄청나 어렵기로 정평이 난 이 홀에서 쇼플리는 깃대로 바짝 붙일 욕심에 상대적으로 짧은 채로 힘있게 티샷을 한 것이다.

한데 결과는 참담했다. 티샷한 공은 빠른 그린의 하단쪽에 간신히 맞더니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결국 트리플 보기, 속칭 양파를 기록했다. 새벽잠을 설치며 이 장면을 TV로 지켜보던 골프팬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두 가지 불문율의 저주였다. 쇼플리가 팔에 힘을 잔뜩 주고 강하게 티샷하는 순간 그의 머리는 평소보다 일찍 들렸고 이로 인해 공도 두껍게 맞아 제 거리를 못낸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이 홀에서만 욕심내지 않았다면 경기의 흐름상 그린 재킷은 마쓰야마가 아니라 쇼플리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고개를 쳐들면 그 순간 진다는 박지원의 명언은 이번 4.7재보선을 전후로 더욱 회자된다. 더불어민주당은 민심도 모르고 고개를 쳐들었다가 참담한 패배를 맞았고 국민의힘은 선거의 압승에 도취되어 지금 한창, 역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끝내 민주당에 아쉬운 점은 말 그대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에 참회를 고하는 건 좋지만 너무 졸렬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결과를 일찌감치 예측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라”고 주문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저도 깨끗하게 지고 다시 의연하게 일어서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저 “모든 걸 잘못 했습니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며 민심을 구걸하려 한다. 검찰개혁도 잘못됐고 조국도 잘못됐고 대통령도 잘못됐다며 머리만 조아리는 것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처음부터 허구와 사기였다는 것을 자인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온갖 정쟁의 한 축이었던 국민의힘은 모든 게 옳았다고 천명하길 바란다.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문재인 정권의 최대 패착은 사람을 잘못 쓰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과 독선이고, 그러다보니 국가경영의 정확한 맥을 짚지 못한 게 오늘의 위기를 불렀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대통령의 리더십, 기껏 자신이 임명한 윤석열과 대치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 조국카드가 실효성이 없다는 게 초장에 감지됐는데도 이 둘을 과감하게 털어내지 못한 결단력의 부족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신의와 의리를 중시한다 하더라도 정치세력들의 온갖 이해와 협잡이 충돌하는 국가통치에 있어선 때로는 선한 리더십보다 냉정하고 독한 리더십이 정책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알았어야 했다. 이게 아니다 보니 문재인 정권의 개혁과 적폐청산은 시간만 끌다가 결국 국민들에게 피로증만 안기는 꼴이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오래 대하다 보면 식상해지는 이치와 똑같다.

이젠 정작 고개를 쳐드는 것을 고민해야 할 쪽은 국민의힘이다. 요즘 힘이 들어가도 너무 들어가 있다. 개표날 국회의원이 당직자를 갑질폭행했는가 하면 어쨌든 야당 단일화의 1등 공신인 안철수는 서울시공동정부 협약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또 팽당할 상황에 처했다. 서로가 치고받은 악담 “건방진 안철수, 대통령이 되면 큰일 날 사람”과 “김종인은 범죄자”를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그들이 말하는 ‘야권통합’은 커녕 그럴 기미조차 찾지 못하겠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윤석열을 간보는 건 좋지만 대통령이 되려면 돈이 있는 국민의힘으로 들어오라며 별 희한한 압박까지 했다. 이러니 국민의힘이 머리, 고개를 쳐들어도 너무 쳐든다는 비판을 받을만 하다. 만약 박지원한테 이런 광경에 촌철살인을 하라고 하면 아마 이런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니라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고 말이다.

사실, 말이야 근사하지만 서울시 공동정부 내지 공동경영 약속은 애초부터 비현실적이다. 1년짜리 서울시장 자리에선 더 그렇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을 이는 것 자체가 우선 권력의 속성과 배치된다. 과거 남경필 전 경기지사가 상대 당에 부지사를 맡기고 인사, 예산의 권한을 공유하는 식의 연정을 실험했지만 선언적인 명분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반면교사다.

이념의 갈라치기와 분열, 갈등에 너무 길들여진 우리나라 정치에선 ‘적과의 동침’은 아직 이상향에 불과하다. ‘건방진 안철수’와 ‘범죄자 김종인’은 차라리 솔직함의 단순한 분출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앞으로는 양측 사이가 더 복잡하고 몰가치하게 흐를 공산이 크다. 안철수가 어제는 동지 오늘은 원수, 이런 시츄에이션에 너무 익숙해 있는 것도 걱정된다. 그래도 선거 때의 오세훈-안철수 찰떡궁합이 오래 갔으면 한다.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목놓아 외쳤던 ‘새로운 정치’를 국민들이 그나마 잠깐이라도 ‘맛’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건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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