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여름방학, 앗아간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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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여름방학, 앗아간 추억
  • 충북인뉴스
  • 승인 2008.07.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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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숙 청주 흥덕구 분평동

“605동 앞에 주차된 충북 xx 가에 ㅇㅇㅇㅇ호, 차 좀 빼주세요.” 이름 아침 빗줄기속에 단지내 방송을 되풀이한다. 장마철에 이사라니. 하긴 이사하기 좋은 계절이 없어진 지는 아주 오래전 일이다. 쏟아지는 비 사이를 뚫고 용케 이삿짐을 안전하게 올려놓은 낯선 이웃의 얼굴엔 승리의 미소마저 떠오른다. 행여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 수십개가 넘는 다양한 학원들이 12시 넘도록 환하게 불을 밝힌 것이 이 동네로 이사를 오는 까닭은 아닐까.

지난주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 반 저녁모임에 나갔었다. 가벼운 눈인사를 주곤 받고는 대뜸 “00은 어디 학원에 다니나요?” 내게 인사와 안부를 겸하여 묻는 그 엄마 얼굴엔 별다른 고민이 없어 보인다. 나의 대답을 받기도 전에 “아 과외를 하시나 보지요.” 내가 머뭇거린 시간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진 않았으나 아마도 내 대답거리에 정확한 답지가 없어 문제를 바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한마디를 더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번 여름 특강은 어디서 듣나요? 그날 늦도록 반 친구엄마들과 저녁밥에 시원한 맥주까지 마시는 친목을 다지고 오는 길에 얻은 정보는, ‘이번 여름 방학을 잘 보내야 중학교 삼년이 수월하다는데…’

친정엄마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나와 내 동생을 시골 할머님 댁에 보냈었다. 늘 객식구까지 열 명이 넘는 우리 집에서 그나마 어린 나이 축에 낀 넷째와 다섯쨀 시골에 보내면 엄마의 손이 덜 가는 명백한 이유에서였다. 두 번의 버스와 멀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실컷 놀면 그뿐이었으니까. 그 덕으로 아직도 바래지지 않은 추억을 담고 있으니까.

기말고사를 보고난 다음 날, 아이는 언제나처럼 성적표를 들고 왔다. 한 학기를 마친 아이의 그것은 중학교 일학년이란 작지 않은 통과의례를 치른 아픔처럼 정확히 비례했다.

국어와 수학은 초등학교 때 받아보지 못한 새로운 숫자의 조합들로 가득 차 있었고 수행평가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한 학기 내내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던 아이의 가상함을 깡그리 무시한다고 여기기에 충분히 느낄 만큼 불친절한 점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애쓴 딸아 놀아라”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삿짐 내리는 소리로 요란한 창밖을 내다보다가, 그 옛날 내 어릴 적 시골집에서 보낸 시원한 여름날 감미로운 추억을 아이에게 주지 못하는 난 창문을 억지로 닫고 대신 선풍기를 돌린다. 왱왱 돌아가는 선풍기 사이로 빼앗긴 방학과 추억 거리 없는 여름날의 혹독함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모로 누운 아이의 여윈 어깨가 도드라져 선풍기와의 묘한 대비가 몹시도 슬퍼 보이는 여름방학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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