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가 한가족 혁환 씨의 풍성한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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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가 한가족 혁환 씨의 풍성한 한가위
  • 김진오 기자
  • 승인 2008.09.11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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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할머니부터 네살 증손자, 이것이 가족의 참맛
서른명 넘는 명절 상차림에도 행복의 웃음소리 뿐

청주산업단지 하이닉스반도체를 안고 도는 우회도로를 건너면 콘크리트로 포장된 시골길이 나온다. 구불구불 이 길을 한참을 따라 가면 논밭과 함께 제법 큰 마을들이 나타난다. 외천, 남촌, 신대 같은 자연부락이 이어지고 그중에 떡마을로 유명한 평리도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부모산에서 이어지는 나지막한 야산이 북쪽으로 미호천과 만나 제법 넓은 평야를 이루니 시골의 추억이 없는 도시인에게도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이 마을 한 켠에 서른두살 혁환 씨가 살고 있다. 순천 박씨 장손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태어나서부터 줄곧 고향을 지키는 혁환 씨네는 인근에서도 유명한 가족이다.

   
▲ 서른명이 넘는 명절상을 차려야 하는 혁환 씨(뒤 오른쪽)네 가족은 추석 일주일 전부터 준비에 분주하다. 칼국수를 밀다 밀가루를 묻힌채 서계신 할머니(가운데)와 아버지(왼쪽), 퍼머약을 바른채 달려온 아내 유정씨와 삼남매 모두 행복이 넘친다./ 사진=육성준 기자
스물한살 이른 나이에 장가 간 터라 아홉 살 장녀 재경이와 여덟살 아들 재정이, 네 살박이 막내딸 재성이 삼남매를 둔 가장이다.
뿐만아니라 부모님과 여든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다.

올 추석에도 서른명 총집합
혁환 씨네 집을 찾은 것은 추석을 일주일 앞 둔 주말인 7일. 며칠전부터 약속하고 찾았지만 역시 대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

어머니는 주말을 맞아 들른 작은 아들 내외와 시내로 추석 음식거리며 옷가지를 사러 가셨다. 혁환 씨 아내 이유정 씨(30)는 삼남매를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미용실에 갔다. 미리 퍼머도 하고 아이들 웃자란 머리도 깎아주기 위해서다.

사진 촬영해야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전화를 걸지만 결국 어머니는 취재진이 떠날 무렵에야 집에 도착했다.
혁환 씨 아내도 머리에 퍼머약을 바른 채 카메라 앞에 섰고 여든 셋 할머니는 손님(?) 맞는 다며 칼국수를 밀다 밀가루 묻은 손 그대로 어색한 포즈를 취했다.

매번 명절이면 이렇게 일주일 전부터는 북새통을 떨어야 한단다. 작은 아버지만 세 분, 혁환씨 동생네, 그리고 가까운 친척 등 명절에 집을 찾는 사람만 족히 서른명이 넘는다.

혁환 씨야 그렇다 치지만 스무살에 시집와 시할머니까지 모시는 아내 유정 씨만 고생복이 터진 것 같다.
하지만 사진취재 해야 한다는 말에 퍼머약을 바른 채 달려올 정도로 어느 새 대가족이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집 기제사만 일년에 아홉 번이여. 여기에 추석과 설 차례, 한식날 까지 합치면 꼭 열두번 제사를 지내야 되지. 제사상 폼나게 차리지는 않어. 그냥 우리 밭에서 난 과일이며 곡식 올려놓는게 다지만 그래도 며늘아이 고생하는 건 잘 알지.”

낯 간지런 칭찬이 서툰 투박한 농촌 시아버지지만 추석을 의식해서일까 이날은 며느리 자랑이 술술 나온다.
“이 집이 82년된 집이여. 두 차례 벽하고 창문만 현대식으로 수리를 했을 뿐 기둥이나 석가래 모두 그대로여. 여기서 내 증조할어버지, 그러니까 혁환이 고조할아버지부터 사셨지. 10년전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3대가 살다가 가셨고 이제 우리 어머니와 내 차례가 남았네.”

15대째 고향마을 지켜
혁환 씨의 아버지(63)가 가리키는 추녀 밑 석가래들은 제비들이 집깨나 지었을 듯 싶을 정도로 오래돼 보였고 나무대문 안쪽 한켠엔 여느 시골집과 같이 소 여물 끓이던 오래된 가마솥의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혁환 씨는 순천박씨 장손이다. 이 마을에서만 혁환 씨가 14대째다. 족히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혁환 씨의 직업은 두 가지 논 40마지기와 밭 2000평을 일구는 농사꾼이자 경운기며 트랙터, 콤바인 같은 농기계를 수리하는 평리공업사의 사장님이다.

혁환 씨는 일찌감치 고향에 터를 잡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목표가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일찍 자리잡고 안정될 수 있다고 믿었단다.

조숙하다고 해야 하나 당돌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혁환 씨의 목표는 이뤄졌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간호사로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스물한살에 가정을 이뤘으니 말이다.

거기다 아내는 불평없이 어른들을 모시니 그런 유정씨를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나온다.
“부모님을 모신다기 보다 얹혀산다고 해야 정확할 겁니다. 결혼하고 한 1년 분가도 해 봤는데 역시 어머니 아버지 그늘만한 곳이 없더군요. 아내도 흔쾌히 따라줘 고맙구요.”

인터뷰 하는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개구쟁이 삼남매와 두런두런 얘기 봇다리를 풀어놓는 아버님. 끝날 무렵 도착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이는 어머님. 아직도 정정해 마음 놓이는 할머니, 그리고 착한 아내. 4대가 함께 사는 혁환 씨네의 올 추석도 웃음만 가득할 것 같다.

할머니표 칼국수, ‘더 주세요’
도시에서 못 볼 수 없는 인심과 정(情)

   

혁환 씨네를 찾았을 때 할머니는 대문 옆 툇마루에 앉아 열심히 밀가루를 밀고 계셨다. 가을이라기에 아직은 따가운 날씨 탓에 사각 내의 바람의 할머니는 손에 온통 밀가루를 묻히고 계셨다.

“손님들이 온다는데 대접할 건 없고 가끔 만들어 먹는 칼국수나 한 그릇씩 자시고 가슈.”

세월 탓에 허리는 잔뜩 고부러졌지만 국수발은 어찌나 가늘고 일정하던지 대충 밀고 썰어낸 식당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뜨거운 국물보다 냉국이 좋다며 간장으로 우려낸 찬 국물에 고추며 김치를 다져넣은 양념과 버무린 칼국수 맛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마당 한가운데 평상 위에 차려 놓은 모양은 어렷을 적 들에 나가 맛보던 새참과 비슷했다.

한참동안이나 밀고 두드리고 썰어 만들었을 국수지만 후루룩 소리 몇 번에 국물까지 비워졌다.
혁환 씨네 집에서 풍기는 환하고 밝은 기운이 여든이 넘은 노구에도 손님을 그냥 보낼수 없다는 할머니의 정이 자식들에게 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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