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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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이라…”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2.18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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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의 ‘보리고개’ 보리밥 예찬

<명사와의 맛집 토크>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음식의 경우 굳이 ‘물린다’라는 표현까지 쓰며 가난했던 시절 구휼식품 수준으로 먹었던 보리밥이며, 칼국수 같은 음식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먹던 음식이라 입에 딱 맞는다. 쌀밥은 제사 때나 먹었지 뭐”라며 자신의 맛집으로 탑동(금천동사무소 대각선)에 있는 보리밥집 ‘보리고개(표준어는 보릿고개)’를 추천했다. “여기에 오면 서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엿보게 되고 내가 어려운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까지 덧붙여가며 말이다.

장 원장은 “셋이 와서 두 그릇만 시켜 나눠먹는 사람도 있더라”며 “상대적 빈곤이 더 문제다. 옛날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장 원장의 말은 세 모자가 연말이면 삿포로의 가락국숫집 ‘북해정’에 찾아와 우동 1인분을 시켜 나눠먹는 것으로 시작되는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단편 ‘우동 한 그릇’을 떠올리게 했다.

보리고개의 메뉴는 공교롭게도 어렵던 시절의 상징인 보리밥과 칼국수가 전부. 보리밥의 가격은 3500원, 칼국수는 밀가루 값 폭등의 영향인지 4000원이다. 메뉴판에 가격을 고친 흔적이 남아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3500원이라고 해서 보리밥에 기본반찬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래기가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에 콩나물, 겉절이, 시금치, 무생채를 비롯해 비벼먹기에 좋은 재료들이 한 상 가득 나온다.

메뉴는 단 두 가지지만 미리 주문만 하면 안 되는 것도 없다. 장 원장은 “저녁에 더 많이 들른다. 빈대떡에 막걸리 한 잔이면 더 바랄 게 없다. 생태찌개나 닭볶음 등 얘기만하면 다 만들어주니까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기에도 제격”이라고 말했다. 사실 점심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다.

유난히 서민적인 맛집과 먹을거리를 강조하는 장 원장에게 학창시절 등 삶의 이력에 대해 넌지시 물었더니 소설과도 같은 지나온 날들을 줄줄이 꿰기 시작했다. “괴산군 청안면 벽촌에서 태어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가출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21살이 되니까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고교 진학을 허락했다. 증평공고 건축과에 입학했고, 일주일에 이틀은 농사를 지었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고 2때 괴산군청 공무원이 됐다. 청주시 공무원이 되면서 청주대 건축과에 입학했다. 옥천군으로 발령이 났지만 학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1987년 충북도 사무관이 된 장 원장은 1991년 퇴임과 함께 현석종합건축사무소를 차렸다. 이후에도 석·박사 학위에 도전해 2006년 모교인 청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1살에 재개된 그의 학업은 58살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장 원장은 현재 청주대 겸임교수로 박사과정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0년 청주문화원 이사, 부원장 3년에 이어 지난해 3월 원장에 취임했다.   

건축사인 장 원장은 고건축 설계 전문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현장인 경복궁 내 건청궁도 그의 설계에 의해 복원됐다. 지역에서는 밀레니엄 사업의 일환으로 주조된 청주예술의전당 앞 천년대종 보호각이 그의 밑그림에 따라 세워졌다.

“21세기를 상징하기 위해 21평의 면적, 2m10cm 기단 위에 누각을 세웠고, 21톤짜리 종을 매달았는데, ‘철골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목조로만 누각을 세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밖에도 용성초, 경덕중 등 공모설계에 의해 학교 신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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