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 2년… 되돌아본 동범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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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 2년… 되돌아본 동범 최병준
  • 민경명 기자
  • 승인 2003.12.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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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시민운동 혁혁한 발자취
본보·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동범상’ 제정, 시상키로…

충북지역 문화예술, 시민운동의 선구자였던 고 동범 최병준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2년이 지났다. 평생을 청빈낙도의 선비로 살면서도 궁색한 기색없이 넉넉한 품이 되어 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시민운동에 혼을 바친 그의 정신은 혼탁한 이 현실에 더욱 절절한 그리움을 던져주고 있다.

이에 본보 충청리뷰와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공동으로 동범 최병준 선생을 기리고 지역 시민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올해의 시민운동가상으로 동범상을 제정, 시상키로 했다.

마침 동범 추모사업회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동범 추모 유고집을 이번 달에 낼 계획인데, 추모집을 근간으로 이 기회에 동범의 삶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주>

문화운동의 선구자
1955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온 동범은 3년 뒤 현 충북예총인 충북예술문화인협회를 창립하면서 지역사회에서 문화운동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 이후 청주문화원장에 취임해 16년을 재임했고 충북예총 회장을 9년이나 지냈다. 청주문화원장 재임시에는 전국문화원 연합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지역 문화 예술 발전에 역량은 쏟던 동범은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 충북도의원 박학래씨 등과 함께 공명선거 캠페인을 벌인 것이 발단이 되어 정치적 보복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공명선거 캠페인은 선거 캠페인의 효시가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여당 후보를 낙선시키고 재야 후보를 당선시킨 성과를 얻었다. 그것은 서슬퍼런 군사정권에 정식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탄압은 눈에 뻔했다. 그로인해 미국무성 초청 미국행 비행기에서 끌려 내려와 곤혹을 치루었고 그 충격으로 쓰러져 심장병을 얻었다. 평생을 인공심장을 달고 살아야 했고 혀를 다쳐 정상적인 발음을 하지 못하고 어눌한 말을 해야 했다.

소설가 임찬순씨는 이 당시 동범 선생에 대해 ‘인생을 뒤엎을 만큼의 재앙’으로 표현하며 그의 두 번째 꿈의 좌절로 꼽았다. 첫 번째 꿈의 좌절은 6.25전쟁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동범은 문화운동가로 일관하던 이 시기에 향토문단을 통해 꾸준히 이름을 냈다. 1952년 봄에 발행된 ‘학’에다 ‘철학적 빈곤’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시대적 퇴폐성을 거론하며 신인간주의를 주장하였고, 직업여성 7월호에는 콩트 ‘D 씨“를 내,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랑‘이란 어휘로 절박한 생활단면을 통해 인간적인 면을 드러낸다.<오세탁, 동범의 문학과 인생>

이때부터 동범은 향토신문에 자주 논설을 게재하였고 충북문협 모임과 청오회(淸會) 등의 문학단체를 통해 향토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시, 수필, 평론 등의 작품을 계속 썼다.

임찬순씨는 “동범 선생이 우리 고장에 남긴 문화 예술 사회 전반에 걸친 혁혁한 발자취는 아무도 지우지 못할 것”이라고 평했다.

시민운동
동범은 71년 공명선거 캠페인과 75년의 민주회복운동을 겪으면서 자기 성찰과 사회연대에 힘을 쏟게 된다. 동범은 문단 등단을 외면하면서까지 사회운동에 몸을 던졌다.

89년 충북시민회를 창립, 충북지역에 시민단체의 태동 틀을 만들었다. 90년에는 충북시민회 회장을 직접 맡아 전면에 나섰고 92년에는 충북공선협 대표회장을 맡아 71년 경험을 되살렸다.

이후 청주경실련 창립, 문장대 용화온천 개발저지 투쟁, 푸른청주 21 추진위 공동위원장, 서원학원 정상화를 위한 청주시민대책위 상임위원장, 실업극복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회장 등 지역 시민 사회단체 활동의 전면에는 항상 동범이 있었다.

신영희 청주 YMCA 사무총장은 “동범 선생이 빠진 청주지역 시민운동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서 “73년 전국에서 최초로 민간단체 협의회를 조직하여 청주지역 순수 민간활동을 펼쳤던 분으로 누구보다 먼저 NGO의 기능과 역할을 아셨던 분”으로 회고했다.

초기 시민운동을 함께한 정영수씨는 “대표자이시면서 대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 스스로 대표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으셨고, 내 주장이 이러이러하니 따르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 그곳에서 하나가되었고, 경제를 하는 사람이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의 구분이 거의 없으셨다.”며 언제나 누구와도 함께 했던 시민운동가 동범의 삶을 회상했다.

평범한 동범, 비범한 동범
중부매일신문 임병무 논설위원은 “평생 이 고장 문화 발전을 위해 열정을 받쳐온 선생에게는 ‘청주문화의 대부’, ‘청주문화의 산파역’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선생은 그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고매한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으며 문화인으로서 체신을 구기는 행동은 늘 경계하며 살아오셨다”며 “비록 경제적으로는 ‘무능인’소리까지 들었으나 고고한 문화예술을 향해 정진하는 선생의 모습은 바람이 불고 눈보라 쳐도 황무지를 지키는 한 그루 외로운 소나무였다”고 쓰고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일정한 직업을 단 한번도 가져본바 없다. 그 궁핍함 속에서도 초창기 문화예술을 십자가처럼 온몸으로 짊어지고 이끌면서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선 선비요, 시민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말년에 터무니없는 횡령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른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가신 것에 많은 지인들의 안타까움은 컷다.
임찬순씨는 “그는 단 한번도 오만한 적이 없고, 단 한번도 권력을 잡은 바 없으며 단 한번도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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