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수사 생각조차 끔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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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수사 생각조차 끔찍"
  • 충청리뷰
  • 승인 1999.05.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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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씨, 학내시위 주도혐의 보안부대서 고문

"20년 동안 재야활동을 하면서 수사기관에서 숱한 조사를 받았지만 수동 보안부대와 미평동 경찰대 공분실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던 곳이다.옆방에서 다른 동료의 비명소리를 들은 때면 몸이 오싹했다. 나중에 때럴 곳이 없으연 발바닥까지 맞았고 잠 안 재우기도 끔직한 고문이었다. 잠을 자더라도 조사실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 깔고 눕는 정도였다. 찬몸에서 몸을 상하기 안성마춤이었다"

80년 5월 충북대 재학중이던 김재수씨는 학내외 시위를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계엄포고령위반으로 수배를 당한 김씨를 잡기위해 경찰과 보안부대는 눈에 불흘 켜고 나섰다.
심지어 군복무 중 휴가를 나혼 김씨의 형을 청주 보안부대로 끌고가 폭행을 가하며 동생의 소재를 추궁 하기도 했다.

특히 방송 · 벽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배자 검거작전이 별어졌고 더 이상 몸을 피할 방법이 없어진 김씨는 80년 7월 경찰에 자수했다.
특히 김씨는 ‘오적’ 이 실린 김지하 시집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위반죄까지 덧씌워졌다.

“당시 군수사대에서 내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가까운 친구까지 조사실로 끌고가서 내가 보는 앞에서 구 타를 하기도 했다. 그때 겪은 심적 고통은 육신이 아픈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단 정신적 고문이었다”
김씨는 대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반공범위반 부분이 무죄로 인정돼 선 고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지난해까지 민주노총충북본부 사무처장을 맡는등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문민정부의 광주보상법 발표이후 피해신청을 미루어왔으나 91년 김대중 정권 출범에 따라 지역의 5 · 18 관련 피해자 6명과 함께 보상신청을 접수했다.

이들은 보상금 가운에 일부를 광주관련 시민단체에 기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5 · 18 보상법에 대해 김씨는 "80년 계엄 상황에서 구속수사받은 사인에 국한하고 있기 때문에 계엄해제 직후 사건 피해자들를 누락 시킨 맹점이 있다.”며 사건사례를 덧붙였다.

81년 5월 16일 김성구, 정지성, 이승원씨등 충북대생과 김창규목사의 주도하께 청주YMCA 강당에서 고 함석헌선생을 초정해 강연회룰 연었다.
강연이 끝나자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진상이 담긴 유인물흘 뿌리고 단상의 마이크를 동해 ‘전두환 타도’ 룰 외치기 시작했다.

결국 강연장에 깔려있던 사복형사들에 의해 그대로 연행됐지만 사실상 청주에서 처음으로 ‘광주 5 ·18 기념식’ 흘 치른 셈이다.이때 붙잡힌 김성구, 이승원씨도 수사괴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집시법위반으로 구속수감됐다.
계엄해제에 따라 포고령위반이 아닌 집시법이 적용됐고 결국 5 · 18 보상법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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