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4.19, 7.29총선까지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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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4.19, 7.29총선까지 ‘활활’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3.04.12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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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일 청주연합시위 3000명 참여…전국지 사회면 ‘톱’
선거출마한 반혁명세력의 ‘가옥 17채 방화’ 50명 구속

옛 신문에서 찾은 충북의 4.19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2년이 흘렀다. 그동안 친일청산이 좌절되고 토지개혁은 흐지부지됐다. 극단적 반공주의로 갈등이 고조됐고 종신집권을 위한 정치적 무리수에 국민은 분노했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독재정치의 정점이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실종 한 달여 만에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은 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충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북지역 시위의 특징은 3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지속적이었고 고교생을 중심으로 연합시위의 양상을 띠었다는 것이다. 일단 충북의 4.19혁명은 규모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당시 3.15부정선거에서 4.19혁명 이후의 상황을 심도 있게 보도했던 한국일보는 청주의 4월18일 연합시위에 모인 군중을 2500명이라고 기사화했다. 이는 같은 날 고려대시위의 군중에 필적할만한 수준이다. 지역의 4.19 관계자들은 “청주는 서울, 마산 등과 함께 4.19 5대 봉기지역으로 손꼽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청주대 도서관에서 4·19 당시의 신문 보도내용을 검색했다.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충북 4.19혁명의 또 다른 특징은 학원민주화운동, 노조설립과 임금인상 투쟁, 수리조합 민주화운동, 엽연초 경작조합 배상운동 등으로 이어지다가 석 달 뒤 7.29총선국면에서 반혁명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낙선운동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10년 4.19 5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지역에서의 4월혁명> 충북편을 집필한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은 “자유당 거물들이 7.29총선에 무소속 등으로 출마했으나 충북의 민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단순한 낙선운동의 수준이 아니라 후보자에 대한 테러와 방화 등 적극적인 양상을 보였다. 도지사가 군부대 출동을 고려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3인조 공개투표 등 노골적 부정선거

종신집권을 꾀했던 이승만 정권의 선거부정은 상식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960년 8월15일 충청일보로 제호를 바꾼 당시 유일한 지역일간지 충북신보(忠北新報)는 1955년 3월26일자에서 이같이 보도한다. “1960년대는 매년 3월26일을 마치 국경일처럼 지냈는데, 그 이유는 이승만 생일이기 때문이다. 청주에서는 청주공고나 무심천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여 경축대회를 개최했다. 청주극장에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벌였는데, 여경을 포함한 경찰들이 동원되어 노인들에게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수건과 담배를 기념품으로 주었다.”

그런가하면 충북신보 1960년 3월12일자는 “청주에서는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각 동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청주시내 각 극장 무료상영권을 배부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선거당일의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부정투표로 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4.19혁명이 끝나고 부정선거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처벌이 이뤄지던 시점에서 드러난 관권선거의 면모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1960년 7월13일자 충북신보는 “경찰·공무원·자유당·반공청년단 등은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4할 사전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민주당 참관인 포섭과 탄압, 완장 찬 자유당원의 투표장 감시 등의 불법선거운동을 자행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공개투표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됐을까? 1960년 3월11일자 동아일보는 “3월9일 청주시내 36개 동의 부흥친목회(통반장 및 자유당 유지들로 구성된 단체)를 각 동별로 일제히 개최했다”며 경찰 입회하에 이뤄진 이날 모임에서 지시된 투표지침을 공개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조장은 선거당일 오전 5시30분까지, 조원은 6시30분까지 약속된 장소에 집결한 뒤 조장이 2명의 조원을 인솔해 3명의 투표용지를 교부받은 뒤 투표소에 입장해서는 조장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다.

선거 하루 뒤인 3월16일 한국일보는 청주의 투표 풍경에 대해 “어떤 조장은 자기 조의 번호표를 회수해 투표용지를 일괄해서 조장이 기표하여 집어넣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3인조, 9인조 공개 및 일괄투표가 강행되자 당시 민주당 선거사무장 이민우 의원은 ‘부득이 선거를 포기 해야겠다’고 개탄하였다. 한편 이날 각 투표소 입구에는 완장을 찬 자유당원들이 3인조, 9인조를 감시하면서 이탈자를 제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 한국일보 4월 20일자는 18일 연합시위에서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소식과 부상자 현황을 속보로 다뤘다.

‘공석별회’ 연합시위를 주도하다

부정선거에 대한 고교생들이 대규모 시위는 2월28일 대구에서 촉발됐다.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토끼사냥, 졸업생 송별회 등 웃지 못 할 명분으로 등교를 지시한데 따른 반발이었다. 당일 대구에서는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충북의 첫 시위는 3월10일 충주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시 장면 후보의 충주유세가 계기가 됐다. 청주에서도 고교생들이 3월 내내 산발적인 시위를 감행했다. 당시에는 학도호국단 학생위원회가 지금의 학생회 역할을 했는데, 청주에서는 학생위원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공석별회’라는 모임이 결성됐다.

당시 청주공고 학생위원장이었던 오성섭씨는 “야당지도자였던 해공 신익희와 유석 조병옥의 호를 따서 ‘공석별회’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별은 ‘우리가 스타가 되자’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청주상고 학생위원장을 지낸 신광성씨는 “옛날 한국은행 (현 CU) 인근에 청원제빵이 있었다. 그곳이 아지트였다. 늘 거기에서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주도한 시위가 산발적이었던 것은 학교 측과 경찰의 제지 때문이었다. 3월13일 청주농고, 3월14일 청주고 등에서 소규모 시위가 열렸으나 무장경관들이 교문을 봉쇄해 가두진출은 무산됐다.

오성섭씨는 “각 학교의 대표들이 모여 밤을 새워가며 호소문, 구호 등을 수천 장의 전단으로 만들었다. 각 학교별로 배분하고 14일 오전 9시 시내에 나가 데모를 하려했으나 미리 발각돼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고 회고했다.

시위가 불붙기 시작한 것은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히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부터다. 4월16일에는 청주공고생 200여명이 청주역(현 청주시청 인근) 광장에 집결했다. 박만순 역사문화연대 운영위원장은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내로 진출한 첫 시위였다. 이들은 중앙시장을 지나 200m를 전진했으나 현수막이나 구호 등을 준비하지 못했고 트럭에서 쏟아져 내린 무장경관들에게 제지당해 30여명이 연행됐다가 당일 모두 석방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경찰은 ‘시궁창 물대포’로 맞서

3월 중순부터 논의돼 온 연합시위는 4월18일에야 실현 된다. 규모는 전국지가 주목할만한 메가톤급이었다. 4월19일자 조선일보는 <청주서도 3000명>이라는 제하에 “막는 경찰에 투석저항”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한국일보도 <청주·동래서 대규모 학생데모>라는 제하에 사회면 톱기사로 다뤘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2500명이 와우산(우암산)에 처음 집결해 시내 진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신문이 보도한 2500~3000명의 학생시위대는 현재에 비춰 어느 정도 규모일까? 당시  청주시 인구는 9만2342명이었다. 현재의 청주시 인구는 지난해 12월말을 기준으로 66만6852명이다. 따라서 현재 수준으로는 2만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한 셈이다. 당시 청주시내 고교생은 11개 학교에 6358명이었다. 이를 놓고 보면 절반에 가까운 학생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오성섭씨는 “청주의 시위규모가 컸던 것은 전교생이 다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18일에는 학교 측이 사실상 시위를 제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청주농고 학생위원장이었던 김상현씨는 “교사 중에서도 학생들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다. 우리가 나중에 그분들을 4.19유공자로 추천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관계자들의 증언과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거의 전교생이 시위에 참여한 학교는 청주공고와 청주농고, 청주상고(현 대성고) 등이다. 청주고의 경우에는 오전 교내시위 정도로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주여고, 청주여자기술고(현재는 폐교) 등도 부분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공고와 농고, 상고의 학생수가 2875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세 학교는 전교생이 다 거리로 나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중에는 청주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청주대 학도호국단 총무부장을 맡았던 김현수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장은 “휴강이 많아 등교한 학생이 적었음에도 350여명이 강당에 모였다. 내 연설을 듣고 정문을 나서서 시내까지 스크럼을 짜고 행진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충북대가 있는 개신동은 당시 청원군이었다. 따라서 시내소식에 둔감했다. 충북대 학도호국단 간부에게 연합시위를 제안했지만 시일이 촉박해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시위대의 목적지는 도청이었다. 그러나 상당공원에서 청주대교에 이르는 당시 철길을 사이에 두고 접전을 벌였음에도 그 선을 넘지 못했다. 김현수 회장은 “철길이라 자갈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돌을 던지니 경찰도 쉽사리 우리를 제압하지 못했다. 청주는 시위규모가 컸음에도 발포는 하지 않아 희생자가 없었다. 그 대신 소방차에 시궁창 물을 넣어 물대포를 쏴대니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회고했다. 4월20일자 한국일보는 시위대 가운데 150명이 연행됐다가 당일 풀려났으며, 부상자는 4명에 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선거로 응징하고, 테러로 또 응징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선언은 곧 공조직의 붕괴를 의미했다. 행정기관과 경찰이 부정선거를 기획, 시도한 주축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선무반을 만들어 치안에 참여했을 정도다. 김현수 회장은 “당시 경찰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 운전기사와 비서까지 제공됐다”는 비화를 소개했다. 

충북도의 고위 공무원들과 경찰 간부들은 예외 없이 쇠고랑을 찼다. 6,7월 충북신보를 종합해 보면 6월13일 정인택 도지사, 문학동 경찰국장, 김상기 사찰과장이 구속되고 이기영 내무국장은 불구속 기소됐다.

1996년 충청리뷰가 출간한 <도정반세기>의 저자 이승우씨는 씁쓸한 뒷얘기를 전한다. “8월18일 문학동 경찰국장은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일본으로 도피했다. 문 국장은 한일회담이 끝난 후 귀국해 형사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이기영 충북도 내무국장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는 청주형무소 수감 중 정신질환이 발병해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겨진 뒤 며칠 만에 ‘나는 결백하다’며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

충북의 4.19가 다른 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학원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다가 7.29총선에서 대대적인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으로 정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국회는 각각 6월15일과 23일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개정헌법과 국회의원 선거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7월29일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치른다. 당시 민의원 선거구 13곳 가운데 9곳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고 괴산·음성·중원에서는 무소속, 단양에서는 헌정동지회 후보가 금배지를 달았다. 참의원 당선자 4명 중에는 3명이 민주당 후보고 자유당 당선자는 1명이었다.

박만순 역사연대 운영위원장은 “자유당 정치인들은 무소속이나 헌정동지회 등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선거에 나섰으나 민심이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7월 초 단양에서 중고생 600명, 보은에서 중학생 800명, 음성에서 중고생 800여명이 이들의 출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개표 이후에도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괴산에서는 시위대가 투표함 22개를 소각해 개표가 중단됐다. 당시 황종률 충북지사가 선관위와 군대 출동을 협의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자유당 정치인이 무소속 또는 헌정동지회로 출마해 당선된 4개 지역에서는 선거결과를 무효화하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7월31일과 8월1일 음성에서 이뤄진 당선자 사퇴요구 시위는 당선자와 선거운동원의 집 17채를 부수는 과격한 양상을 보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출간한 <지역에서의 4월혁명> 충북편은 “7.29선거 후 괴산군·중원군·음성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228명이 연행되어 구속된 인원은 총 50명에 이른다. 사건의 규모를 보면 7.29선거 당시 지역주민들의 반혁명 세력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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