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유목민…단양에 파오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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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유목민…단양에 파오를 짓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3.04.26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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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면 현곡리 산골에 헌책 13만권 소장한 ‘새한서점’
손수레노점으로 시작해 잠실·고대 앞 거쳐 현 위치로

 다시 책을 찾아서-산골 헌책방 새한서점

유럽에는 ‘책마을’이 있단다. 책을 보고 알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동네’라는 부제가 붙은 미술평론가 정진국이 쓴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2008·생각의 나무>가 그 책이다. 파리에서 유학한 정씨는 프랑스와 스위스, 영국, 독일, 베네룩스 3국 등의 24개 책마을을 돌아본 뒤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 중 프랑스 브르고뉴의 ‘퀴즈리 책마을’에 대한 소개는 이러하다. “책마을을 선언한 지 어언 8년째. 샤르도네 품종의 포도밭에 둘러싸인 한적한 고장이 책을 아끼는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해졌다. 책을 답답한 학교나 공공기관에 가두어두지 않아서 좋고 서점과 마을도 살리니 일석이조.”

와인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지만 귀동냥으로 들었던 와인의 고장 브르고뉴가 책마을이라는 것은 더 생소하다. 그러나 프랑스 명문 출판사 라르마탕이 본점을 동부의 산골마을 브르고뉴로  옮겼단다. 또 이곳의 책방에 있는 서적들의 수준도 상상 그 이상인가 보다.

책의 본문이다. “한나절 동안 다른 서점을 둘러보고 온 내게 부르동은 신바람 난 표정으로 책을 내밀었다. ‘자기 서점에 없으면 세상에 없다’고 으스대듯 수백만 권의 물량을 자랑하는 다국적 인터넷 서점에서조차 찾지 못하던 책이다. 에밀 부르다레가 1904년 조선을 탐사하며 기록했던 <조선에서>였다.”

더 말해 무엇 하랴. 서울의 대형출판사, 체인망을 갖춘 대형서점이 아니면 도서시장에 끼어들 수조차 없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면 꿈같은 얘기다. 유럽에 책마을이 있다는 것을, 책을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정도로…. 

▲ 새한서점 이금석씨의 친구는 산새다. 산새들이 서가에 들어와 해마다 오래된 책 위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친다.

우리나라에도 책마을이 있다면 파주 해이리의 출판단지 정도가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일원에 있는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다. 1999년에 설립된 이 단지는 48만평 규모에 500여개 출판사, 50여개 인쇄사, 대형도서유통사 등이 들어서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아직 2차 산업 수준이다. 산업단지라는 말에서 왠지 굴뚝 냄새가 난다. 산업이라는 말이 들어가야만 공적자금이 투자되고 업체들이 모인다. 이야기가 있는 진정한 책마을은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책마을은 아니지만 유럽의 책마을에 있을 것 같은 산골 헌책방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56번지에 있다. 와인향기는 아니지만 시인 박목월이 <나그네>에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고 노래했듯이 농주(農酒) 냄새가 풍길 것 같은 궁벽한 산골의 농로가 끊긴 그 자리에 새한서점이 있다.

판자를 얼기설기 붙이고 천막으로 지붕을 얹은 허름한 건물에 무려 13만권의 헌책을 소장한 서점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반전이다. 청주 최대의 대형문고인 영풍문고의 장서가 10만권인 것에 비춰보면 새한서점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앞니가 빠져 인상이 순박한 초로의 사내가 느릿느릿 문을 열었다. 새한서점의 주인장 이금석(62)씨다.

제천시 송학면이 고향인 이씨는 원래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했었다. 이씨는 “1978년 리어카에 헌책을 싣고 다니며 노점으로 시작했다. 가게를 처음 낸 것은 잠실에서였다. 자투리땅에 임시건물을 짓고 책을 팔다가 잠실이 개발되면서 집이 있는 고려대 앞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35년 세월이다.
노태우 정권 말에는 데모가 심해서 잠시 고대를 떠나야했다. “닭장차(전경버스) 6,7대가 가게 앞에 상주하다보니 장사가 안됐다. 답십리, 길음동, 역곡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990년대에 다시 고대 앞으로 왔다”는 것이다.  

책을 들고 유목하다가 단양까지

▲ 이금석씨는 유목민이다. 손수레노점으로 시작해 잠실, 답십리, 길음동, 고대 앞, 역곡 등에서 헌책방을 하다 2002년 단양으로 왔다. 단양에서 현재의 산골로 들어오기까지 자리를 한 번 옮겼다. 그의 파오(BAO·북방유목민의 조립식 집)는 현재 단양 적성에 있다.
서울 최대 규모의 헌책방은 20세기라는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이씨는 “복사기가 대량 보급되면서 헌책을 찾는 사람들이 현격하게 줄었고 IMF를 기점으로 헌책이든 새 책이든 사람들이 책과 멀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도 고향행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이씨는 당초 고향인 제천 송학으로 헌책방을 옮기려했으나 장소를 구하지 못해 폐교가 된 단양군 적성면 적성초등학교로 내려왔다. 2002년의 일이다.

“책을 옮기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20만권은 족히 됐을 것 같은데 상당량을 버리고 내려왔다. 임대조건 때문에 2009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기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 책방 하나를 옮기는데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릴까? 이씨 혼자서 작업을 했고, 무엇보다도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옮기지 않으면 정리가 불가능하다”는 이씨의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갔다. 실제로 새한서점의 서가는 도서관처럼 분야가 정리돼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문받은 책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새한서점을 찾는 사람은 하루에 1,2팀 정도다. 책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판다. 우체국 택배를 통해 하루 5~10권 정도를 부친다. 이씨의 말대로 “입에 풀칠할 정도”의 벌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씨와 새한서점은 2012년 7월 유명해졌다. KBS의 연예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2일’에 소개되면서부터다. 이씨는 “좁은 산길에 차와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그런데 와서 사진만 찍고 가더라. 서점과 책이 세트장이 되고 소품이 된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씁쓸함이 얼굴에 스쳤다.

그는 왜 책에, 아니 헌책에 삶에 전부를 걸었을까? 이씨는 “먹고살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정작 책방을 하면서 책을 읽은 시간은 없었다”고도 했다. 건물 2채에 아르바이트 3,4명을 두고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빴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했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한 달에 1,2번은 책을 솎아내고 헌책을 또 샀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책 중독 “헌책 더 구해야하는데…”

▲ 새한서점에는 없는 책이 없다. 40년 묵은 내셔널지오그래픽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러고 보니 이씨는 책에 중독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이씨는 한양공고를 졸업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학교도서관에서 도서부원으로 일한 것이 이씨가 책과 맺은 첫 인연이다. 아무리 먹고살기 위해서라지만 그가 리어카를 끌고 헌책 노점으로 나섰던 전후관계가 비로소 설명 된다.

‘이 많은 책을 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중에 기증할 의사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하는 데까지는 해야지. 기증이랄 게 있겠는가. 15년은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가고나면 책은 남는 것 아니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15년이라면 이씨의 나이 77세, 헌책방 인생 50년이다.

이씨는 현재의 자리를 떠날 생각도 없다고 했다. 아니 폐교라도 그럴듯한 시설을 갖춘 적성초등학교보다 현재의 자리가 더 낫다고도 했다. 이유는 “산속에 있고 물이 있어서”다. 물이라고 해야 서점을 끼고 돌돌 흐르는 작은 계곡이다. 무엇보다도 “새한서점이 단양읍내에 있었다면 얘깃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관광과 서점을 겸한 시설을 만들고 싶다”는 이씨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이씨는 “지금까지 단양군에서 도움을 받은 것은 없다. 작년부터는 군에서도 도울 거리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어쨌든 책 중독이 분명하다. 이씨는 “죽을 때까지 팔아도 다 못 팔 것”이라면서도 “지금 정도 양은 더 들어와야 한다. 좋은 책은 다 빠져나갔다. 책을 더 구하는 것이 숙제”라고 말했다. 책을 사러오는 사람은 간혹 있어도 책을 팔러오는 사람은 없는 산골책방에서 이씨는 책을 살 궁리에 골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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