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옛 기억, 이발소…1980년대여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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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옛 기억, 이발소…1980년대여 응답하라!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4.02.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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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고종, 1895년 단발령 이후 왕실 이발사 채용 120년 이발 역사
미쳤어, 남자가 어떻게 미장원에 가니?… 추억으로 남은 동네이발소
둔중한 의자는 비행선의 조종석을 떠올리게 했다. 의자 옆의 쇠뭉치를 당기면 굉음을 내며 건물 전체가 수직 부양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운을 입은 이발사는 어린 나를 팔걸이에 얹은 널빤지 위에 앉혔다. 겨울이발소의 추억은 흑백이다. 시커먼 연탄난로와 김이 서린 창문이 그렇고, 면도날을 고르던 혁대와 연통에 문지르던 면도솔의 비누거품 또한 흑백이 조화를 이뤘다. 가위는 은빛으로 빛났고 이가 빠진 머리빗에는 세월의 더께가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이발이 끝나면 타일이 촘촘하게 박힌 세면대 앞에 앉아 나무 팔걸이에 두 손을 모아야했다. 이발사는 능숙한 손가락의 반동으로 머리를 털고 물뿌리개를 이용해 머리를 감겼다. 플라스틱솔로 머리를 긁어주는 이발소도 있었다. 그때 그 빨래비누 냄새는 곧 이발소 냄새이기도 했다.

▲ 80년대 이발소 부흥기를 겪은 ‘정통 이발사’ 막내 뻘인 박씨.

▲ 청주시청 구내이발관 박일규씨는 욕심없는 출퇴근 이발사다.

우리나라 이발의 역사는 기껏해야 100년 남짓이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된 뒤 고종의 머리를 깎았던 왕실 이발사 안종호로부터 따져도 채 120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범부들이 이발소를 드나들며 멋을 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다.

굳이 이발소의 전성기를 따지자면 1970~ 1980년대다. 1980년 이후에는 남성들도 미용실에 드나들기 시작해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도심에서 주마등처럼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과 마주치는 것은 눈 먼 거북이 바다 위에서 널빤지를 만나는 일과 같다. 등이 유난히 크고 요란하다면 이발소로 가장한 퇴폐업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된 이발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손에 익은 가위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기술은 장맛처럼 익어가는 것. 그 손맛에 반한 이들은 이발사를 쫓아다닌다. 이발소는 오래된 주택가의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거나 목욕탕의 이발부 소속이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객지로 이사를 갔어도 머리를 깎으러 고향을 찾는다니 두 말 하면 무얼 하랴.

청주시 상당구 수동 338-1번지(상당보건소 맞은 편 골목)에 있는 남기성(73)씨의 주중이발관은 ‘오래된 이발관’이다. 이발사 보조경력을 빼고도 5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이발사가 머리를 깎고 이발기며 가위, 머리빗, 드라이어까지 모두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오래된 손님들이 긴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면서 주인장과 나누는 대화부터가 빛바랜 옛날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간혹 세상을 떠났고, 때로는 그 이름마저 가물가물하지만 누구도 입찬소리는 뱉지 않는다.

이발소 안을 둘러보면 더욱 가관이다. 때 절은 등잔받침부터 램프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조명기구를 비롯해 나무절구와 맷돌, 각종 놋그릇 등이 지금은 세월의 뒤란으로 사라진 어느 농가의 살림살이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강을 신주단지 모시듯 맨 위에 올려놓은 것도 눈길을 끈다. 남씨는 “놋요강도 귀한 것이지만 백자요강은 조선시대 작품(?)”이라고 했다. 전문가가 아니니 그대로 곧이들을 수밖에 없다. 아니 요강을 사용해보지 않은 세대의 눈에는 영락없는 백자항아리다.

백자요강부터 카메라까지 수집 매니아

렌즈가 이안(二眼)인 ‘야시카’ 카메라와 금도금, 은도금 시계도 세월의 이력을 간직한 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발의자만 치우면 어엿한 생활사 박물관이다. 수천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을 수집한 경로도 예사롭지 않다. 쓸 만한 물건을 버리는 꼴을 보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남들이 버린 물건을 하나둘 주워 모은 것이 그 시초다.

남씨는 “살아오는 동안 편지봉투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편지가 오면 글씨를 지워 경조사용으로 재사용했다”며 자신이 잡동사니를 모아온 내력을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수집내력을 알게 된 단골손님들이 머리를 깎으러 올 때마다 한 점 두 점씩 들고 온 것이 이발소를 만물상으로 만든 것이다.

수많은 소장품 중에 남씨가 가장 아끼는 것은 반세기를 넘긴 무반동 이발기나 구형 헤어드라이어 등 이발용품이 아니라 목재를 켜는데 사용하던 ‘거도(巨刀)’다. 회전톱이 등장하기 전에는 반달 모양의 거도로 목재를 켰는데, 아흔 살을 바라보는 늙은 목수가 거도와 대자귀, 대패 등 목공구를 기증했다는 것이다.

남씨는 “서운동에 살았는데 이름은 모른다. 벌써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 그 노(老) 목수는 노임도 두 배나 받아 거도 하나로 육남매를 키웠다는데, 그 중에 의사도 나왔고 박사도 있다고 하더라”며 그 내력을 전했다. 남씨는 얘기 끝에 “나도 슬하에 삼형제를 뒀는데 교수도 있고 대기업 간부도 있다”는 자식자랑을 곁들였다. 남씨가 거도를 아끼는 이유를 알만했다. 연장만 다를 뿐, 손기술 하나로 일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장인의 자부심이 통한 셈이다.

청원군 강외면 오송이 고향인 남씨는 1950년대 후반 이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주로 나온 뒤 3년여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기성이발관의 주인이 됐다. 수동에 둥지를 튼 것은 1963년. 지금이야 미용실에 밀려 손님이 크게 줄었지만 196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수동에서 개업 3년 만에 방이 8개 딸린 가옥 2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가위를 잡은 지 60년이 넘은 청주 최고령 현역 이발사 남기성씨(청주 수동 주중이발관)

▲ 남씨는 우암산 청소부터 이발·한문교육 봉사까지 하루 24시간이 짧다.

가위소리와 함께 단골이여 영원히

그러나 남씨는 자만하지 않고 자원봉사를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했다. 의용소방대에서 40년 , 통장으로 32년을 봉사한 것이다.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그루터기처럼 한 자리를 지켰지만 수차례 통·반이 조정되고 법정동이 통합되면서 통 이름은 숱하게 바뀌었다. 30대 초반 6통장으로 시작해서 10통장으로 퇴역했다.

남씨는 특히 매일 새벽 5시 우암산에 오르며 등산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치우는 우암산지기로 이름을 알렸다. 그 세월만 보탬 없이 50여 년이다. “우암산을 좋아하니까 하는 일입니다. 내 산이요, 정원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2,3년 전부터는 무릎이 아파서 매일 같이 산에 가지는 못합니다.” 우암산 자락에서 우암산을 기대고 살아온 우암산지기의 고백이다.

정기휴일인 수요일을 제외하고는, 새벽 6시30분에 문을 열어서 해가 저물고 손님이 뜸할 때까지 남씨의 이발가위는 멈추지 않는다. 휴일에는 이발소 문을 닫지만 남씨가 쉬는 날은 아니다. 통장을 그만둔 뒤로는 봉사활동으로 한문을 가르치러 다니기 때문이다. 남씨는 모충동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서 5시간을 꼬박 봉사한다.

이발요금 4000원, 이발이 곧 봉사

그러나 남씨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봉사는 다름 아닌 이발이다. 주중이발관의 이발요금은 4000원으로 다른 이발관의 요금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이다. 염색도 7000원만 받는다. 이발가위를 들고 굳이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지 않아도 늘 봉사를 하는 셈이다. 동네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다 보니 사실은 미주알고주알 따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받는다.

“괴산, 진천, 보은은 물론 서울이나 강원도 정선에서도 단골손님이 옵니다.” 단골손님이 객지로 이사를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 계모임에 참석하러 청주에 오면 꼭 들른다는 것. “어디 머리만 깎으러 오겠습니까? 얼굴도 보고, 얘기도 하러 오는 것이겠죠?” ‘서울 이발 솜씨가 선생님만 못한가 보죠?’라는 우문에 대해 남씨가 들려준 현답이다.

그 중에서도 남씨가 자랑하고픈 단골은 거미박사인 임문순 전 건국대 교수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과서에도 나오는 분입니다. 10여 년 전 청주에 생태탐사를 왔다가 우연히 우리 집을 알게 된 뒤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머리도 깎고 염색도 하러 내려옵니다.”

남씨는 “비록 동네 이발관이지만 전국에서 가장 고객층이 넓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남씨는 또 “100년 전만 해도 선조들은 상투를 자르면 막심한 불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남의 머리를 깎아주며 한평생을 살았으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남씨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범부의 삶도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시청 이발사? “공무원은 아닙니다.”

젊은 세대는 구내이발관이란 단어조차도 귀에 설을 것이다. 구내이발관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다. 그러나 구내이발관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들도 도청이나 시청, 구청에 아직도 구내이발관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젊은 공무원들도 모르는 것 같아요. 하루에 열 명만 다녀가도 금방 소문이 나겠죠. 차차로 좋아지길 바라는데 글쎄 잘 모르겠어요.” 청주시청 구내이발관을 운영하는 박일규(56)씨의 말이다.

푸념은 아니었다. 구내이발관은 본관 뒤, 차고 한 구석에 있었다. 간판도 없이 이발등만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박씨는 그만큼 분주하지 않았다. “공무원은 아니시죠?” 박씨가 웃었다. “목욕탕 이발부에서 일하다가 같이 일하던 이의 권유로 인수했어요.” 박씨는 2013년 3월 청주시 구내이발관을 인수했다. 박씨의 전임이 낮에 시청 구내이발관을 운영하고 밤에는 목욕탕에서 하루 이모작을 했던 것. 그만큼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박씨는 이런 사실을 알고 들어왔다.

“큰아들이 이번에 대기업에 취직을 했어요. 작은 애도 취업을 준비하고 있고. 토요일에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2시면 들어가고, 휴일에는 공무원들 하고 같이 쉽니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정년이 없는 일이니 은퇴하고 싶을 때까지 가위를 잡는 게 소망이라면 소망이죠.” 박씨가 구내이발관을 선택한 이유다.

80년대 하루 30명 머리 깍아 대성황

그러나 1981년에 이용사 면허를 땄다는 박씨는 치열하게 살았다. 한 20년 바깥에서 일하다가 최근 10년은 목욕탕 이발부에서 일했다고 했다. 증평이 고향인 그는 어렵던 시절에 생계수단으로 가위손을 선택했다고 했다. “1980년대에는 하루 30명은 깎았어요.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빴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양산업이 된 것 같아요. 목욕탕으로 들어갔는데 일거리가 많은 큰 목욕탕은 자리가 나지 않고 작은 목욕탕들은 손님도 적고 목욕탕이 부도가 나니….”

성안길에서도 이발관이 성업이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작은 동네이발소도 혼자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시내 88이발관 같은 데는 이발사, 면도사 합쳐서 열 댓 명이 일했죠. 열 명 넘는 이발관도 많았습니다. 목욕탕 이발부는 머리를 감겨주지 않아 편했어요.” 그러나 박씨는 이같은 추억을 간직한 이발사 세대의 끝자락에 서있을 뿐이다. 청주에는 이제 이용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조차 없다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발소의 비품도 옛 모습이 아니다. 연통이 거추장스러웠던 연탄난로 대신 단출한 전기난로 하나로도 다섯 평 남짓 이발소 안이 훈훈했다. 갑자기 박씨의 이발가위가 궁금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옛날 연장이 좋았죠. 일이 끝나면 매일 숫돌에 연장을 갈았어요. 지금 것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숫돌에 갈 수가 없어요. 날이 무뎌지면 무조건 공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렴하고 편리한 구내이발소의 매력

공장으로 들어가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정도라면 가위 값이 예사롭지 않을 터였다. “쓸 만한 것은 최소 20~30만원은 줘야죠. 100만원, 150만원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전엔 일제를 썼는데 지금은 우리 것도 잘 나옵니다.” 박씨는 가위라는 단어 대신에 꼬박꼬박 연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손님 두 명이 들고났다. “전전(前前) 이발사가 오래했죠. 그 양반은 직원 머리스타일을 다 알았습니다. 이것저것 설명하기 싫어서 다니다 보니 여기만 옵니다, 본청 떠나서 다른 데로 나가도 여기에 오게 됩니다. 동네이발소도 안가요.” 구내이발소는 요금도 저렴하다. 앞면도까지 하면 8000원이고, 커트는 7000원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 당겨보고 싶던 쇠뭉치는 의자를 눕히기 위한 손잡이였다.

“앞면도 해드릴까요?” “아니 면도는 됐습니다.” “그러면 코털만 손봐 드리겠습니다.” 이같은 대화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발소에 가보시라. 구내이발관은 외부손님도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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