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어라, 부디 잘 견디어서 오라

나의 십대에게 보내는 연서 … 김선영 장편소설 <내일은 내일에게>

2017-12-29     충청리뷰

류 정 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제이에게.
오랫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거기는 어떠하냐. 눈보라가 산촌 풍경을 희미하게 지우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덮었겠지. 낮에는 뒷산에서 참나무를 베다가 장작을 팼겠지. 일찍 찾아온 겨울저녁에 쇠죽솥에 불을 지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귓불이 발갛게 얼고 손발은 시린데 입김에 의지해 일신(一身)을 겨우 구부정하게 세우던 시절, 화적의 무리같이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바람 속에서 스스로 열을 내서 견디는 수밖에 없었던 시절, 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잘 있느냐고 묻기에도 민망한 줄 안다만, 그저 잘 있으리라 믿을 뿐이다.


여기는 2017년,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근근 밥술이나 뜨며 비루하게 사는 것이야 별다를 것 없다마는, 배곯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으니 괜찮은 셈이지. 게다가 주머니에 술값 몇 푼은 마르지 않고, 더러 책도 구해 읽을 수 있으니 복 받은 삶이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김선영 장편소설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다가 문득 거기 생각을 하고 안부를 묻는다.


고등학생 연두는 음습한 저지대 동네에서 새엄마와 이복동생 보라와 함께 산다. 낳아준 엄마와 아빠는 죽고 없다. 새엄마는 성격이 괴팍해서 살림이 알뜰하지 않고 수틀리면 매질이 일쑤다. 보육원이나 복지시설에 보내져 홀로 되는 것이 두려운 연두는 차갑고 거친 엄마가 달갑진 않지만 반항하기보다 순응하며 견딘다. 네가 그렇듯이 다른 수가 없으니 그럴 것이다. 너 또한 외지로 나가 떠도는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슬하에서 지내고 있을 테니, 연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새엄마를 엄마로 부르는 형편이라면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빈부가 극명하여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는 학교생활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휴대폰을 가질 수 없어서 친구도 없는 상황, 가난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빈부가 곧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이곳의 물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너나없이 빈궁하여 오히려 공평한 너의 학교와는 아주 딴판이니 말이다. 하여간 연두가 처한 환경은 그렇게 황량하다.


연두, 유겸, 마농 그리고 카페 ‘이상’


그러나 제이, 혹 사람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동네에 새로 문을 연 카페 ‘이상’은 연두에게 에어포켓 같은 공간이다. 에어포켓이란 침몰한 배 위 공간에 내부의 공기가 남아 있는 걸 말하는데, 연두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곳이니 하는 말이다. 도시에서 세입자의 처지는 때로 시한부인 경우가 많으니 그 비유가 헛말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선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농담이 흔히 회자되니까.


연두는 카페에서 커피콩 고르는 일을 하며 세상과 교감한다. 동생 보라의 방황, 유일한 친구 유겸이의 상처,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가 엄마를 찾아온 마농, 같은 듯 다른 아픔을 품고 견디는 주변인들의 삶에 공감하고, 길을 찾고 선택하며, 치유하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함께하며 온기를 느낀다. 길고양이 네로와 얌이의 사랑과 죽음을 목격하는 것조차도 한 아이의 성장에 바쳐진 거름과 같은 것임을 소설은 보여준다.


연두에게 또 하나의 친구가 있다면 그건 책이다.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 친구가 없이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연두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제이 너도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집에 읽을 만한 책이 없어 만화책 한 권을 마르고 닳도록 보는 모습, 이웃마을 사촌누나에게 세계 명작 소설을 빌려다 읽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요새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뜻은 알고 읽는 건지 문득 궁금하구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짐작할 수 있겠니?


나의 사주(四柱)를 보고 혀를 차며 ‘어떻게 살아 있느냐’고 묻던 선배가 있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자신의 십대를 소환해 등을 토닥여주며 말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 견디고 있다고, 틀림없이 나중에 괜찮은 어른이 될 거라고. 지금 내가 괜찮은 어른인지 장담은 못 하겠다만, 훗날 네가 괜찮은 어른이 되어 이 소설을 한번쯤 읽게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한 번도 신을 믿고 모셔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나이가 들수록 오만과 편견이 심해져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설보다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귀가 솔깃한 편이다. 그러니 나는 기도할 줄을 모르고, 안다고 해도 들어줄 신이 내게는 없다. 그런 알량함을 무릅쓰고 기도하마.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돌아갈 수도 없는 그곳에서 너는 부디 잘 있어라. 언젠가 네가 여기에 도착하면 나는 떠나고 없을 테지만 속절없는 마음이나마 전할 수 있을까 하여, 소설의 운을 빌려 정유년 세모에 써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