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미학

2019-07-17     충청리뷰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작금의 한일간 무역분쟁은 우리나라 언론의 진면목, 이른바 정체성을 확인하는 참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그동안은 친일문제와 관련하여 특정 언론사에 대한 정서적 편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 실체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노골적으로 일본이나 아베를 편드는 언론을 보면 “그들의 머릿속이 이 정도였나”를 재삼 깨우치게 돼 놀랍기까지 하다.


물론 한일 무역분쟁은 양쪽 다 상처를 입히게 되고 산업의 구조상 한국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의 궁극적인 노림수가 단순 무역갈등이 아니고 한국의 국력신장과 남북평화무드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우리나라 경제의 급소를 찔러 새로운 차원의 식민지화를 구축하려는 의도였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그렇더라도 이를 해석하는 친일언론의 숨길 수 없는 DNA는 “이 곳이 일본인가?”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치욕적이다. 한국은 무조건 잘못했고 일본은 철저하게 선견지명의 지혜로움으로 나서고 있다고 추켜세운다. 일본을 방문한 우리나라 실무 대표단이 말도 안 되는 홀대를 당해도 “한국 탓”이라 하고 보통 사람들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에는 “큰 나라 국민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고 한다. 멀리서 찾아온 한국 대표단에게 악수는커녕 물 한 컵도 준비하지 않은 일본의 소인배적 대처를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쪽발이 근성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를 실체적 사실로써 확인하게 됐다.


개인적인 바람으론 지금의 무역분쟁, 아니 한일간 싸움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토착 왜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흔히 말하는 친일과 친일분자들이 왜 척결되어야 하는지를 이젠 국민 스스로가 자각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무역분쟁이 고조되면서 이미 언론계는 물론이고 정계와 기득권층에서도 이 땅에 뿌리깊게 숨어있던 왜구들이 자기의 본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회학자들은 싸움과 갈등에는 반드시 성장도 수반된다고 한다. 싸움의 미학이니 싸움의 철학이니 하는 말들은 이래서 나온다. 범인들도 일단 누구와 싸우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 정도와 가치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국가간 외교와 통상에서의 싸움은 매우 복합적이다. 다양한 문제와 변수가 얽히고설켜 승패가 판가름 난다. 이 과정에서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새롭게 해석도 하고 이를 극복하고 적응하는 데 있어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상을 고민하게 된다. 이른바 ‘외적 투쟁’에 따른 ‘내적 성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금의 한일 무역분쟁은 ‘순기능’으로 바라보면 속이 편하다. 당장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경제를 더욱 옥죄는 악재가 되고 현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도 코앞으로 닥치고 있는 내년 총선의 최대 걸림돌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나쁜것만은 아니다. 대 일본 의존의 국가경제구조를 손질하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남북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내공을 키울 특단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아울러 그동안 말로만 외쳐오던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이번 분쟁은 결정적 호재가 되고도 남는다. 어차피 일본과는 지난날의 일그러진 역사 때문에도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면 이젠 근본부터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번 싸움을 제대로만 수행한다면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대한민국을 짓눌러온 ‘일본 징크스’도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역사의 진화는 가열한 싸움이 전제될 때만이 비로소 가능했다.


“익숙한 앎들로부터 벗어나, 미지의 것을 접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순간, 우리의 발목을 잡아 왔던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의 세계는 열린다. 우리 안의 어두움, 히스테리, 피해의식, 절망을 털어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비로소 그때 우리는 두 번째 인생의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다.” (박성수의 <둥글이, 싸움의 철학>)
우리 지역에서도 오랜 기간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공원 민간개발과 청주테크노폴리스개발에 대한 청주시와 시민단체간 다툼이다. 일단 이 문제는 시민단체가 조건부 거버넌스 참여를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수를 맞게 됐다. 양측의 이번 분쟁은 그동안의 행정편의주의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우선 의미가크다.


통상 자치단체들은 특정사안을 놓고 무슨 위원회나 자문회의 등을 만드는데 익숙하다. 이를 상시 기구로 두는 경우도 많다. 의사결정의 민주적 절차와 공론화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은 집단민원으로 상징되는 위험의 예방과 분산, 더 냉정하게 말하면 친위 세력을 구축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행정부서가 미리 가이드 라인을 정해놓고 요식행위로 이들 단체를 동원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청주시와 시민단체가 그동안의 반목을 털고 다시 거버넌스 구성에 합의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것도 없다.


청주시와 시민단체간 이번 분쟁을 보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지금 대책위는 그야말로 소신을 다해서 싸운다지만 오랫동안 지역의 상징처럼 인식됐던 시민세력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일처럼 행동했다는 점이다. 이는 시민세력의 자체 내부에서도 나오는 얘기다. 문재인 정권 들어 시민운동이 급격히 관료화되고, 지역에서도 이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추세의 역기능 쯤으로 해석된다.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이지만 어차피 투쟁은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사이비가 된다. 관료문화에 순치되고 공익과 정의를 향한 공분보다는 자기안일에 더 방점을 둔다면 시민운동에 대한 지지는 결국 힘을 잃게 된다. 그렇더라도 과거 시민운동의 싹이 트던 독재, 권위시대와 비교해 현실은 많이 달라졌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극도로 다분화, 전문화된 현재의 시민운동은 투쟁보다는 오히려 대화와 설득, 공감이 대안이 되고 더 효과적이다.


그러기에 도시공원 민간개발과 청주테크노폴리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자치단체장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이를 근거로한 시민단체와의 기탄없는 대화가 절실한 것이다. 이를 간과하고 청주시의 강행과 시민단체의 고군분투가 앞으로도 계속 싸움으로만 부딪친다면 결과는 뻔하다.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사람을 만들어 가려고 하겠지만 그 권력에 믿음을 잃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인식의 역모에 유혹된다. 모든 혁명의 단초는 이랬다. 이 것도 싸움의 철학과 미학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