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진출의 교두보 적성산성
북부권<1> - 단양군<2>
▲ 구봉담 | ||
▲ 옥순봉 | ||
단양군 하방리 산 3-1번지 적성산성이 있는 성재산으로 가는 길은 잡풀이 우거지기는 했지만 오르는 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성재산으로 오르며 무너진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취가 1979년 사적 265호로 지정된 적성산성이다.
▲ 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대에 축성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 ||
성안에서는 신라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인 청자기와조각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말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단양 지역에는 당시 축성된 많은 성들이 있는데 적성산성도 이 중 하나이다.
새로 단장된 성벽을 따라 북동쪽 치성에 올라서니 성벽 앞으로는 남한강이 널직한 호수처럼 펼쳐진다. 타고난 험준한 지세로 남쪽으로는 죽령, 북동쪽으로는 영춘과 영월로 이어지는 남한강 상류지방, 북서쪽으로는 남한강을 따라 하류 쪽으로 청풍·충주로 이어지는 긴한목 중에서도 긴한목이다.
▲ 신라 주위치도. 진흥왕 대 이후 세력을 팽창해 갔던 신라는 전방에 군사 기지로서 주(州)를 설치하여 이를 기반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 ||
적성산성 양옆으로는 단양천과 죽령천이 감싸 흐르며·정면은 남한강이 흐르며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천연의 해자를 이룬 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려면 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을 지역방어의 중요한 지점으로 신라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던 산성이다. 그러므로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적성산성을 점령한 후에 남한강 물길을 따라 한강을 점령하게 되는 북진의 거점이 된다.
깊은 물과 거대한 준령들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형적인 이점을 지닌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온달산성·가은암산성·독락산성·죽령산성·공문성 등 많은 산성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하고 북진정책을 이룩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가지 적성산성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팀이 발견한 적성비가 성안에 있기 때문이다.
적성비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1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문에 의하여 신라 법흥왕과 진흥왕 시절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의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뻗어갈 수 있는 요충지로 이용하였던 성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이 밝혀졌다.
▲ 적성비문 | ||
머리돌이 없는 갈(碣)의 형태로 아랫부분 끝이 좁은 것으로 보아 받침돌에 꼽는 형식으로 세워졌던 것 같다. 3조각으로 갈라진 비석 중 현재 2개가 발견되었는데 글자크기는 1.5∼3cm로 총 글자수는 400여자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가 음각되어 판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풍의 해서체로 진흥왕 순수비보다 격이 낮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중국의 남북조 초기의 모양과 일치하여 서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적성비각 | ||
단정하고 아담한 적성비각 처마 아래 서서 호수 건너로 눈길을 돌리니 남쪽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인다. 소이산(360m)이다. 소이산에는 봉수대가 있다. 연기나 불을 이용하여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재난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설치한 통신수단이 봉수다. 소이산 봉수는 경상도 동래에서 출발하여 한양의 목멱산에 당도하는 제2로에 속하며 경상남·북도의 내륙을 거쳐 죽령을 넘는 제2노선에 해당하며 경상도 영풍군 순흥부 죽령산 봉수의 연락을 받아 서쪽의 청풍군 오현봉수로 연결되던 곳이다.
▲ 적성산성 평면도 | ||
적성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도라지 밭에서 만난 70이 훨씬 넘었다는 촌로는 자신이 어린 시절 외중방리 봉산 언저리에 살았었는데 소이산에 올라가 봉수대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적성산성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중앙고속도로 건설현장의 굉음을 들으며, 문득 천여 년 전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힘에만 의존하여 거대한 성곽을 쌓아올렸을 우리 조상들을 떠올리니 그들이 겪었을 고초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발 아래로 석양에 물든 붉은 호수가 삼켜버린 옛 단양의 정취는 찾을 길이 없고, 몇몇 산자락에 붙어있는 예전의 집들이 그나마 스쳐 가는 허허로움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1. 제비봉 : 5. 영월 왕검성(寧越正陽山城) 6. 적성비 비문의 내용 신라 호적에 관한 학설 뒤집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