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전 천장이 화려한 월악산 신륵사
북부권<2> - 제천시<1>
2005-03-21 충북인뉴스
창건 및 연혁에 의하면, 신륵사는 제천 지방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찰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582년(진평왕 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대덕사라고 하였고, 다시 신라 30대 문무왕 때에 원효대사가 중창하였다. 그 뒤 고려말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해군 때 사명대사가 각각 중창,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월악리 쪽에서 바라본 월악산 | ||
▲ 중창 이전의 신륵사.지금은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당간지주가 탑앞에 서있다. | ||
▲ 신륵사 극락전 | ||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토를 지난 곳에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진 이상향인 극락정토가 있는데, 고해의 바다에서 번뇌하는 중생이 부처의 가르침을 쫓아 열심히 염불하며 정진하면 죽어서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는 일반 중생들에게 사후의 행복한 생활을 제시함으로써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세계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절집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 삼존불 | ||
▲ 극락전 앞뜰의 당간 지주 | ||
▲ 극락전 외벽의 불화 | ||
▲ 극락전 내부의 불화들 2 | ||
▲ 후불탱화 | ||
▲ 극락전천장의 그림들 | ||
극락전 왼쪽 바깥 처마 아래에는 1960년에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가 걸려 있다. 극락전 바깥벽은 다양한 벽화가 있다. 건물 외벽 오른쪽 상단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는 장면인 「선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미타도, 관음도, 달마대사도, 반야용선도 등이 그려져 있다. 한편 외벽 풍판 안쪽의 천판에는 커다란 물고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내용은 큰 물고기가 중간물고기를, 중간물고기가 작은물고기를 잡아 먹는 모습인데, 이 그림은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극락전 합각 천판의 물고기 그림 . 위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1 | ||
극락전 앞 뜰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그리고 국사당이 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달아 세우는 깃대를 고정시키는 받침대를 말한다. 크기는 두 지주의 높이가 각각 높이110㎝, 넓이는 동쪽 것이 40㎝, 서쪽의 것이 43㎝로 차이가 있다. 두 지주는 아래위로 60㎝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홈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동쪽 것은 홈이 좌우로 맞뚫려 있다. 신륵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296호로 지정되었으며 극락전 정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이다.
▲ 복원공사 중 발견된 소형토탑 | ||
▲ 산신 | ||
이 월악산신사가 국가적 기도처에서 후에 마을의 수호신격으로 성격이 달라졌는데,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월악산 신사는 방치되어 폐허화되었다. 그 뒤 주위 마을은 흉년이 들고 대홍수가 났으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신륵사에는 주술에 능한 한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이처럼 흉년이 드는 것은 사람들이 월악산 산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저버렸기 때문이라 하여 절 경내에 국사당을 지어 월악산에 상주하는 신령님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 국사당 전경. | ||
현재 국사당에는 ‘局師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국가에서 내리던 최고의 승계인 국사(國師)의 의미와 절을 수호해 주는 신에게 제사를 제내는 국사단(局司壇)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는데 국사당이 전해오는 내력과 내부에 봉안된 탱화로 보건대 국사단(局司壇)으로서의 의미가 더 맞지 않나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