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암과 우탁선생
남한강 물길을 따라서<11>
▲ 상선암 | ||
우탁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로 금수산 자락 아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인근에서는 새원이라고도 부른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적성 땅에는 ‘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세 곳 있는데 새원이·새터·새말 등이다. 이곳이 이른바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품달촌으로 새원이에서는 우탁 선생이, 새터에서는 조선시대의 명필이며 대학자인 지수제와 유척기 선생이 태어났다.
우탁 선생은 고려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충렬왕 4년에 향공진사가 되면서 관직에 나섰는데, 선생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308년 충선왕 즉위년, 우탁 선생이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일이다. 왕에 오른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한 일이 생겼다.
▲ 역동선생기적비 | ||
우탁 선생은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는데,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를 못하였다. 이에 우탁 선생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이 근신이 되어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느냐?”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왕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예안현 지삼리에 은거하며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롭게 유입되던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 주었다. 특히 정이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이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여 달포만에 이를 터득하고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易)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선생을 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탁 선생은 경서와 사기를 통달하였고, 더욱이 역학에 정통하니 점괘가 맞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려사」열전에 전하고 있다. 후세에 전하는 역동 선생의 시조로는 청구영언에 「춘산에 눈 녹인 바람」과 늙음을 한탄한 「탄로갯가 있다.
▲ 중선암 | ||
사인암은 우탁 선생이 사인벼슬을 지내며 이곳에서 청유하였다는 유래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인암 밑을 흐르는 운계천의 옥같이 맑은 물, 첩첩이 쌓아 올려져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절벽, 어우러진 노송 등이 일품이다. 사인암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우탁 선생의 친필각자를 보기 위해 발길을 옮기니 물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사찰에서 친 울타리와 자물쇠가 걸려진 쪽문이 시절의 각박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쪽문 앞을 맴돌다 보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비가 바로 역동선생의 시비였다.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역동선생이 말년에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탄로갗이다. 사인암 주변에 널려있는 너럭바위에 더위를 피해온 피서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름이면 늘 있는 모습이다.
▲ 하선암 | ||
사인암 밑으로 다가서니 연마라도 한 것처럼 판판한 암벽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탐승했던 유명·무명인들의 이름과 글귀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 그간 세월의 더깨와 풍류를 보여주는 듯 했다. 사인암 위쪽 물 한가운데는 1977년 이 지방의 유림에서 건립한 역동선생의 기적비가 섬처럼 떠 있다. 아름드리 노송의 솔내가 진동하는 그 밑에서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선생의 친필은 아니었지만 선생의 뜻이 담긴 글을 대하니 아쉬움이 한층 덜어졌다.
▲ 사안암 앞의 바둑판 | ||
탁이불군(卓爾弗群)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호불발(確乎不拔)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 둔세무민(遯世無憫) 세상에 은둔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다 유유자적하는 역동선생의 모습이 그대로 글에 담겨져 있으니 사인암에서 금방이라도 선생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우탁 선생이 청유하며 장기와 바둑을 두었다는 널다란 반석 위에는 실제 장기판과 바둑판이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세상시름이 씻기듯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 사인암 전경 | ||
1. 단양팔경과 단양 2팔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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