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축성술의 보고, 충주산성
북부권<3> - 충주시<1>
▲ 금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 정상 표석. 정상에 충주산성이 있다. | ||
예전에 종민동 나루에서 내린 죄인들이 마즈막재를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애닯은 눈물고개가 이제는 위락시설들이 들어선 시민들의 여가공간으로 바뀐 셈이었다. 마즈막재 정상을 알리는 석비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을 하여 산정으로 나있는 임도를 기어가듯 돌고돌아 5㎞여를 오른 후에야 새로 복원된 성의 동문 밑에 다다를 수 있었다.
빈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에 부치는 가파른 비탈에 우람하게 쌓아올린 성벽의 위세에 올려다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사다리를 타고 현문으로 되어있는 성의 동문으로 올라갔다. 충주시 동편으로는 계명산, 남산, 대림산이 시가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데 금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은 해발 636m로 정상에는 충주산성이 있다. 충주산성은 안림동 56-1, 직동 산 24-1, 목벌동 산 54번지에 걸쳐 있으며 1980년 1월 9일에 지방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복원된 충주산성의 동문쪽 성벽. | ||
충주산성은 해발 636m의 남산 정상과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은 안림동, 동쪽사면은 목벌동, 동남쪽은 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충주산성은 금봉산(남산)의 꼭대기 부분에서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남북 방향으로 발달된 지세에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쌓았다. 성벽은 돌만을 사용하여 내탁 외협축 방식으로 쌓았으며, 산꼭대기에서부터 느리게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수용하면서 쌓았는데 기울기가 급하며, 서쪽의 성벽만은 정상 바로 아래 부분을 통과하도록 쌓았다.
▲ 충주산성 서쪽 성벽 | ||
일설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했다고도 전하는데 이는 개로왕이 북쪽의 안림동에 있는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되고 있다. 1977년에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1986년 충주공업전문대학(현 충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 충주산성의 수구 모양.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내쌓기를 하여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했다. | ||
수구는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내쌓기를 한 다음, 큰 판돌을 2단 겹쳐 올려 놓아 앞면에서 보면 그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하였다. 수구의 앞단에는 넓은 판돌을 성벽의 바깥 끝 선에서 14㎝ 정도 푹 튀어나오게 하여 물이 성벽에 떨어지거나 스며들지 않고 성벽 밖으로 떨어지도록 쌓았다.
출수구를 통하여 안쪽을 들여다 보면 판상석을 깐 바닥이 계단처럼 조금씩 높아지며 천장 또한 같은 방식을 취하여 출수구의 너비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수구를 통하여 적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내의 물이 바깥으로 빠지는 순서를 살펴보면 수구 안쪽의 좌우 차단벽→왼쪽차단벽→도수로→입수구→배수로→출수구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이같이 성벽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계단을 통해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진 고대의 수구로는 보은의 삼년산성·문의의 양성산성·옥천의 성치산성이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 충주산성 동문지 발굴 전 모습(성 바깥쪽). | ||
▲ 충주산성 북문지에서는 충주시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 ||
▲ 충주산성 동문지에서 보이는 심항산봉수. | ||
1. 창룡사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나옹화상과 조선 선조때 서산대사가 중창했다는 사찰로 충주 사람들에게는 ‘남산절’로 불리운다. 2. 계명산 : 3. 개로왕 : 6. 충주산성 축성 설화 마귀할미 축성설과 남매축성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