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 교촌·교동·교리·향교동·교운리·교성리·교흥리·교월리·교원리·대교리·교사리·교평리·교현동 등 충주의 많은 지명은 향교와 관련이 있다
2. 일곱칸의 동.서무가 있는 충주향교 : 충주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7년(162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건립하였는데 고종 광무1년(1897)과 1936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36년 전석영 군수가 명륜당과 외삼문을 새로 지어서 오늘에 이른다.
| | | | ▲ 호성사와 신위(오른쪽) | | 3.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 : 7세기 신라 때 유학자이며 대문장가로 문명을 떨쳤던 강수는 충주 사람으로 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교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을 꿈에 보고 낳았는데 실제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머리에 뿔이 솟아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현인에게 물으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했다 한다. 강수라는 이름은 후두골이 유난히 높았던 그의 골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통일 시기인 문무왕 때 외교문서를 잘 다루어 삼국통일에 공을 세웠으며 김인문이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는「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라는 표문을 지어보내니 당나라 고종도 그 글을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김인문을 신라로 보내주었다 한다. 청년 시절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에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라.”라고 만류하였다. 그러자 강수가 답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거절하였다 한다. 강수가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이 해마다 조 1백 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 강수는 외교문서로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6두품인 사찬의 관등과 조 증봉을 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 지내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으나 모두 불사에 공양했다. 그리고 강수의 아내가 생활이 곤궁하여 향리로 돌아가려 하자 대신이 이를 알고 왕에게 고하여 조 1백 석을 주게 하였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강수는 신라사회 6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 등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신흥의 유교 관료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유교적 문인으로 의의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