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처럼 굼실대는 소나무가 있는 단호사
북부권<3> - 충주시<4>
2005-07-29 충북인뉴스
▲ 단호사 경내 | ||
▲ 단호사 약사전 | ||
비구대처의 분규는 종파의 분열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보다는 기득권 다툼 위주로 치닫다 1970년대에 이르러 대처승도 인정하자는 교단이 조계종에서 분리되어 한국불교태고종을 설립함으로써 일단락지게 되었다.
하지만 양 종단은 종지나 소의경전 등 이념과 사상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단호사 경내로 들어서면 기와를 얹은 낮은 담으로 쳐진 절터가 좁고 불당들이 미미하지만, 보물 제512호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봉안된 곳이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69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 단호사 경내에 있는 소나무.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 | ||
단호사는 조선 숙종(1675∼1720) 때 중건한 후에 약사라 개명하였다고 현판에 기록되어 있고, 1954년 단호사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약사전의 주존불인 철불좌상을 보면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인 11세기 무렵에 창건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하지만 철불좌상이 봉안된 원래의 자리를 알 수 없으므로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다.
▲ 단호사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불좌상. 다소 근엄한 인상을 준다. | ||
단호사 철불좌상은 약사전의 주존불로서, 높이 1.3m며 나발로 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 새로 만들어 끼운 백호가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호는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법의는 통견이고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양어깨 위로 넘겨져 뒷면에도 조식(彫飾)되었으며, 결가부좌한 양 무릎에도 의문(衣紋)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수인(手印)은 양쪽 손이 모두 파손되어 근래에 만들어서 끼웠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조성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11세기 고려 초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부근에 있는 보물 제98호 충주철불좌상과 같이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가 사라지고 단정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변화의 일면으로 볼 수 있으며, 지역적 특수성을 연구하는데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주존불의 협시보살로는 왼쪽에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이,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석고로 제작되었다. 철불좌상 뒤로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는데 나이론포 바탕의 채색화로 길이와 폭은 각각 184㎝, 180㎝이다. 이외의 탱화로는 1960년에 제작된 산신탱화를 비롯해서 신중탱화, 칠성탱화가 있다. 약사전 뒤쪽으로는 1973년에 조성된 시멘트로 만든 6m의 미륵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단호사에서는 법당을 28평 규모로 석·목조를 혼축하여 기둥을 세우고 다포집으로 조성한 불사가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약사전 앞뜰에는 노송과 함께 비바람에 퇴색된 삼층석탑이 1기 서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단호사 삼층 석탑. | ||
2, 3층의 탑신 및 옥계석은 초층과 유사하나 2층 옥개석의 층급 받침만이 3단으로 되어 있다. 노반은 방형으로서 윗면 중앙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있다. 우주 및 탱주의 모각수법, 옥개석의 낙수면 등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고려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단호사 경내 약사전 앞에는 수령 500여 년이나 된 소나무가 있는데, 높이는 8.5m이며 둘레는 2.1m이다. 이 소나무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일화가 ‘하단마을 자랑비’라는 비문에 적혀 있다. 이 소나무는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그 때 강원도 지방에 문약국을 운영하던 어떤 사람이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으로부터 충주에 있는 단호사에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홀로 이곳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던 차에 적적해 뜰에 소나무를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 단호사 앞에는 '나무관세음보살'이란 편액을 달아 놓은 길다란 자연석을 세워 놓았다. | ||
충주 철불좌상과 단호사 철불좌상은 조성 기법이 서로 흡사한 것으로 보아 충주 지역의 불상 제작소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충주 지방이 예부터 철의 주산지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기문화가 발전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고려 초기 이후 철불 조성은 점차 드물어지게 된다.
사람의 키보다 큰 불상들을 철로 제작함으로써 제작비에 대한 부담을 줄였던 나말 여초에 비해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문화가 고급화되고 귀족화 되어감에 따라 불상 또한 고급화를 추구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조선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으로 일반 신도가 줄어든 반면 왕실에서 조성한 불상들은 순금이나 옥, 금동과 같은 고급스런 재료를 사용하였으므로 철과 같은 소박한 재료는 멀어지게 되었다.
철불 조성은 정치, 사회적으로 전환기이며 왕조 교체기였던 신라 말과 고려 초기의 짧은 동안 크게 유행했었다. 철불은 불교미술사에서 한 시기의 종교적 열정과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