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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터뷰
"내 인생에 기권은 없다"
2004. 07. 31 by 충북인뉴스
‘패전 처리 전문 투수’

프로야구 좀 봤다는 사람들은 감사용(47)을 그렇게 기억한다. 아니 기억조차 못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는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남은 시간이나 수습하는 ‘패전 처리 전문 투수’이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감사용은 인천을 연고로 한 꼴찌의 대명사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일한 왼손투수였다. 87년 은퇴할 때까지 그가 거둔 성적은 1승 15패 1무 1세이브, 삼진은 47개를 기록했고 방어율은 6.09였다.

이런 감씨를 소재로 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 오는 9월 17일 개봉한다. 경남 창원의 한 대형 슈퍼마켓에서 관리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감씨를 지난 28일 만났다.

◆ “야구도 인생도 기권은 없다”

먼저 ‘감사용’이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감씨는 “영광”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처음에 영화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박철순이나 선동열, 최동원 정도는 돼야지 내가 무슨 이야기거리가 됩니까. 농담으로 듣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6년간 틈날 때마다 나를 찾아와 설득한 감독의 인간적인 면에 끌려 결국 승락을 했습니다.”

야구선수로의 감씨의 성적은 남들에게 내세우기 초라했다. 그러나 감씨의 인생에서 야구가 차지하는 자리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슈퍼스타’ 못지 않았다.

“야구나 인생이나 기권은 없습니다. 아무리 승산 없는 시합이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결과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지만 마운드에 오르기까지 내가 쏟아부은 노력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패전 처리 전문 투수’라고 말들을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일이 저에게 맡겨졌을 때 마운드에 올라 온힘을 다해 공을 던졌습니다.”
감씨는 ‘패전 처리 전문 투수’가 아닌 남들이 하기 싫은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구원 투수’였다.

◆아파트 살 돈 마련하려고 프로에 뛰어들다

경남 진해가 고향인 감씨는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해 경남 마산고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지역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마산상고와의 시합에서 투수 겸 3번타자로 뛰면서 3연타석 홈런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감씨는 “야구로 대학을 진학하거나 프로야구가 없던 당시 실업야구계에 스카우트 될만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인천체육전문대를 졸업하고 81년 현역으로 군생활을 마친 감씨는 바로 창원공단 내에 있는 삼미 특수강에 입사해 구매관리와 통관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창원공단 내 22개 사회인 야구팀이 있었는데 만년 꼴찌였던 삼미 특수강은 감씨가 입사하면서 그해 내리 3개 대회를 우승했다. 모기업인 삼미가 만든 프로야구단이 그해 겨울 경남 진해로 동계훈련을 왔다. 창원의 ‘야구 도사’ 감씨는 회사의 배려로 오전에만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야구단의 안내를 맡으면서 같이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씨는 ‘파견사원’ 형식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이 넘게 야구선수로 등록조차 안된 그야말로 순수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런 내가 실업야구 및 국가대표 등으로 날고 뛰던 선수들 사이에 끼어 프로로 입단한 자체가 그야말로 놀랄 일이었습니다. 당시 삼미 특수강에서 내 월급이 13만원쯤 됐습니다. 그런데 프로야구단에 들어가면 그보다 10배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딱 3년만 선수로 뛰면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면 미련없이 다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1승보다 더 소중한 무승부

감씨는 5년간의 프로생활 중 단 1승을 올렸다. 자신의 유일한 승리가 기억에 생생할 만도 한 감씨는 “롯데와의 경기서 6이닝을 던져 승리투수가 됐다는 것 말고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82년 당했던 ‘12연패’의 씁쓸한 기록에 대해서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결과에 대해선 무덤덤한 감씨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경기는 자신의 유일한 무승부 시합이었다.

“OB와의 경기였는데 4대2로 지고 있는 7회말에 등판했습니다. 투아웃에 주자는 2루와 3루, 타자는 OB의 간판 윤동균이었습니다. 윤동균을 내야플라이로 처리해 위기를 넘기고 나니 9회에 삼미가 2점 홈런을 쳐 4대4 동점이 됐습니다. 내가 8이닝을 넘게 던지며 점수를 주지 않아 결국 연장 15회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다음날 어깨와 등이 하나로 붙어 있는 것처럼 아팠을 정도로 역투를 한 경기였습니다.”

키가 171cm인 감씨는 유달리 손이 작다. 운동선수 출신인데도 보통 남자들 손보다도 작고 손가락도 짧았다. 투수에게 이는 엄청난 핸디캡이다. 감씨는 “프로야구 원년의 스타 박철순의 손을 봤을 때 손가락이 어찌나 길고 굵은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프로의 벽은 예상보다 높았습니다. 훈련을 쫓아가기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합을 하는 것도 힘에 부쳤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얻어맞을 때가 더 많았지만 신나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순수 아마추어 출신인 내가 국가대표 출신 타자를 삼진으로 잡을 때의 희열은 말도 못 하게 짜릿했습니다. 마운드 위에 서 있을 때 난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식 투자 실패… 또다시 패전투수?

87년 감씨는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수로서는 빛을 못 봤지만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던 고향에 ‘야구 바람’을 불어넣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87년에 창원시 야구협회를 만들어 사회인 야구를 활성화시켰고, 이어 김해 삼성초등학교·내동중학교 야구단을 창단해 무보수로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감씨는 90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마산에서 고깃집을 열었다.

그러나 용돈이나 벌어보려고 장난처럼 뛰어든 주식 투자가 감씨의 발목을 잡았다. 감씨는 “야구 다음으로 참 열심히 했던 게 주식투자였는데, 한번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까지 해보자는 성격이어서 더 손을 못 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식 투자의 실패로 고깃집도 5년만에 문을 닫았다. 돈도 많이 잃었지만 마음고생이 훨씬 심했다고 감씨는 회상했다. 창원에서 또다시 고깃집을 열어 재기를 노렸으나 IMF 등 잇단 악재에 다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사회인 야구선수들이 배불리 먹으며 야구에 대해 격의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되는 고깃집을 운영하겠다’는 감씨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2년 전부터 감씨는 창원의 한 대형 슈퍼마켓에서 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자’주의자인 감씨는 직함에 상관없이 일손이 달리면 직접 물건 진열도 하고 배달도 나간다. 왕년의 프로야구 선수였고 영화까지 제작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가게 매상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간혹 알아보고 인사나 사인을 청하는 사람까지 생긴 창원의 ‘슈퍼스타’ 감씨는 8월부터 ‘G&G’라는 인터넷방송포털사이트 홍보업무를 맡아 또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예고편에는 이 같은 자막이 나온다.
‘프로 야구 20년 역사상 은퇴 투수는 총 758명이다. 그 중 1승 이상 거둔 투수는 431명이다. 나머지 327명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야구계를 떠났다. (중략) 이 영화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패전 투수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감사용을 꼴찌 중의 꼴찌로 알고 있다. 그러나 ‘패전 투수’로 결론을 내리기엔 감씨의 ‘인생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때처럼 감씨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가 인생의 ‘승리 투수’가 될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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