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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터뷰
“받았으니 갚으려 했을 뿐이다”박금단 자린고비 대상 수상자
2002. 11. 07 by 충청리뷰
남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음성군이 지난 98년부터 매년 시행하고 있는 자린고비상은 자린고비 전설로 유명한 조선 숙종때의 조륵(1649∼1714)의 근검절약과 선행을 기리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이들을 시상하기 위해서다.
올해로 5회째인 자린고비 대상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근검절약 생활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수년간 장학금 쾌척 등 이웃사랑을 실천해온 박금단(58. 여.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씨가 수상했다.
그러나 박씨의 형편은 남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박씨 집은 겨우 비만 피할 정도의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에 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을 쳐 놓았지만 여전히 냉기가 돌았다.
방안에는 이렇다할 가재도구도 없을뿐더러 부엌은 재래식 아궁이에 그을음만 가득하고 변변한 그릇하나 보이질 않았다.
다만 툇마루에는 두부를 만들 때 콩을 갈기 위해 사용할 믹서기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수년간 장학금 쾌척과 경로잔치 개최, 수재의연금 기탁, 좀도리운동 참가 등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했는지 수상자 박씨를 만나봤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본인 스스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장학금 쾌척과 경로잔치 개최, 수재의연금 기탁, 좀도리운동 참가 등 이웃사랑을 하게 된 동기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장학금을 주고 경로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남들은 저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우리는 언제 남들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나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는 가운데 89년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형편이 어려워 자식들을 더 이상 공부시키지 못할 처지에 놓였었다. 이때부터 비석새마을금고에서 우리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줘 아들 셋이 무사히 대학까지 마쳤고, 딸도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자식들이 대학교육과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 아이들도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도 넉넉지 못하지만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에게 돌려주고 싶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장학금으로 내 놓은 것이다. 한해 농사를 지어 햅쌀로 노인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등 경로잔치를 베푼 것은 내 부모에게 잘 하겠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다. 수재의연금 기탁이나 좀도리운동 참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어려울 때 생각도 나고 가슴이 아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평소 근검절약 실천과 수년동안 이웃사랑을 위한 재원마련 방법은?

“화장품은 기초적인 것 한 두개 있고, 미장원에는 1년에 한번 가는 정도다. 세간살림은 시집올 때 해 오지 않아서 신혼 초 생활하며 장만한 것을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옷도 내가 산 것이 없고 고모들이 주신 것과 이웃에서 준 것이 고작이었으며, 최근에는 딸이 돈을 벌어 사 준 옷을 입은 적이 있다. 촌에서는 돈이 될만한 것이 없다. 그저 아끼고 안 쓰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부지런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들일을 주로 했으며 남의 일, 내 일을 가리지 않고 하루도 쉰 날이 없었다. 일을 하다 보니까 낮이고 밤이고 시간이 부족했고, 식사를 제대로 못 할 때도 있었다. 밭에서 콩을 수확하면 두부를 만들어 증평이나 주덕 음성 등지에 나가 팔기도 했으며, 가끔은 식당 일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을 매월 5만원씩 저축해 연 60만원씩 장애학생이나 부모도 없는 학생, 할머니 모시고 사는 학생 등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5∼6년간 내 놓은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수확한 쌀 가운데 일부를 좀도리운동과 마을 노인들 식사대접 등 경로잔치를 위해 사용했다. 농사를 안 짓는 어려운 이웃에게 ‘햅쌀 맛좀 보라’고 한말씩 전달하기도 했다.”

내가 남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장남의 역할이 컸다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장남의 힘이 컸다. 엄마 혼자 산다고 아이들이 삐뚤게 나갔으면 열심히 일 한들 무슨 보람이 있었겠는가? 만약 아이들이 삐뚤게 나갔다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겠는가? 큰아들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나의 일을 열심히 도와 주었다. 들일을 할 때에는 팔을 걷어 부치며 도와주었고, 집에서 만든 두부를 팔러 떠나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두부를 날아다 주었다. 또 동생들에게도 우애 있게 잘해주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등 맏이로서의 역할도 잘해 주었다. 큰아들이 우리 집 가장역할을 제대로 해 주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은?

“지금까지 자녀들을 혼사 시키지 못했다. 큰아들 혼사는 내년에 치를 예정이다. 자녀들 혼사부터 치르고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이웃사랑을 위해 노력하겠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의 심정을 알겠다.장학금 등 수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다시 환원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받으려고만 하는 것 같다.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돈 욕심 내지 말고 서로 돕고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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