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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터뷰
“여중생 사망사건, 잊지 맙시다”‘미군장갑차 살인사건 충북대책위’장민경사무국장
2003. 02. 21 by 충청리뷰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는 주 5일제 근무의 확산으로 모두들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토요일, 청주시내 철당간 광장에서 시위를 기획한다. 지난 15일로 벌써 9번째 행사를 마쳤다. 누군가 해야 하고, 그래서 잘못된 것을 바꿔야 하는 일에 몸을 던진 그는 ‘미군장갑차 故 신효순·심미선양 살인사건 충북대책위(이하 충북 여중생 대책위)’ 사무국장인 장민경(33)씨다. 한 때 10만명이라는 믿기지 않을 숫자가 촛불을 든채 서울 광화문에 모여 울분을 토했고, 청주에서도 2000명을 불러 보았던 바로 그 사건, 두 여중생의 죽음에 관한 문제가 그가 최근 매달리는 ‘주제’다.
일부에서는 “아니, 아직도 여중생 문제야?” 하는 식의 시선을 보내지만 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대선 전, 여론의 초점이 됐던 촛불시위는 대선이 끝나자 언론보도에서도 멀어졌다. 사람들도 하나, 둘 이 사건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 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장국장도 이 점이 안타까운 듯 “SOFA가 개정될 때까지 매주 토요일 열리는 규탄집회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뿐 아니라 3·1절, 4·19, 5·18 등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날에는 대규모 시위를 갖고 두 여중생의 사망 1주기인 6월 13일에도 대대적인 규탄집회를 연다는 것이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장국장은 촛불시위를 시작한 이래 ‘정신이 없었다’는 말로 바쁨의 정도를 표현했다.

- ‘충북 여중생 대책위’는 누가, 언제 출범시켰는가.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가 주축이 돼서 충북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지난해 11월 30일 대책위를 꾸렸다. 현재 상임대표는 노영우 목사님이 맡고 계신다. 지난해 6월 두 여중생의 49재 때 성안길 입구에서 추모행사를 연 뒤 한동안 소강상태가 계속됐으나, 이들을 죽인 주한미군이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동안 비가 오는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철당간에서 항의집회를 열어왔다.”

- 대선 직전에는 2000명 가량의 청주시민이 집회에 참가했다고 하던데…
“지난해 12월 14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2000개의 초가 모두 나갔다. 서명도 그동안 3만여명에게 받았다. 이번처럼 서명이 잘된 적도 드물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으니까. 12월에는 오히려 시민들의 힘에 떠밀려 온 것 같다. 촛불시위 어디서 하느냐고 시민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을 정도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시위 용품을 만들어 가지고 오는 등 대단히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서울에는 미국대사관이 있고, 다른 도시에는 미군부대나 기지촌처럼 미국과 직접적이며 상징적인 것들이 있는데 반해 청주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는 도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2000명은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어 장국장은 “시민들의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래서 감동도 많이 받았다. 여중생 사건이 전국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에 홍보가 잘 돼 행사를 진행하는데도 힘이 많이 됐다. 전에는 일부 사람들만이 반미를 외쳤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된 것 같다. 특히 국민들이 민족의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일부 사람들은 촛불시위가 이제 막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SOFA가 개정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텐데 대선직후 급격히 시들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이 끝난 후 ‘先 북핵문제 해결 後 SOFA 개정’을 약속하고 촛불시위 자제를 요청한데다 보수언론에서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로 끌고 가면서 사람들이 무관심해진 것 같다. 그런데 여중생 범국민대책위에서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시민들이 ‘촛불시위는 계속돼야 한다’고 답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범국민대책위에서는 여중생 죽음외에 반전·평화내용을 첨가했다”

- SOFA는 개정될 것이라고 보는가.
“단시일내에는 어렵지만 결국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 당선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많은 국가가 미국과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을 맺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불평등한 협정을 맺은 나라는 없다. 우리 국민의 목숨을 내주면서까지 이 협정을 준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두 여중생의 죽음 역시 SOFA 개정 없이는 진상조차 규명할 수 없다.”
SOFA 개정을 의심치 않는 장국장은 효순·미선의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건도 주한미군이 처리하고, 당시 사건 현장보존이 안돼 있다. 그리고 사체 부검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미국측에 정보공개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들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있는가.”
청주대 도시지역계획학과를 졸업한 그는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다. 90년 학내 등록금투쟁에 참가하면서 운동에 눈을 뜬 그는 졸업 후인 97년까지 학생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수배 끝에 잡혀 3개월간의 구치소 생활도 경험했다. 이후 사회에 나와 충북민권공대위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지역의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돈을 벌 생각도, 출세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장민경 국장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통일운동이다. 지역의 통일사업을 대중적으로 하고 싶다. 북핵위기가 있어도 6·15 공동선언이 진행되는 것처럼 남북 민간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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