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이념분쟁 초월, ‘영부인’과 ‘빨치산 여전사’의 극적인 화해
상태바
현대사 이념분쟁 초월, ‘영부인’과 ‘빨치산 여전사’의 극적인 화해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5.07.09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20년대 엘리트 신여성, 옥천 고 육영수 여사- 괴산 고 류금수 여사
대지주 집안·아버지 축첩 비판 불구 운명적인(?) 후처 결혼 ‘공통점’

농촌 부녀회 편지 챙긴 육 여사, 류 여사 좌익전력 불문 신원회복 지시
조총련계 총탄에 숨진 육 여사 장례식장 찾아가 먼발치서 명복 빌어

지난 주 본보 881호에 실린 칼럼 ‘박 대통령이 모르는 어머니 이야기’에 대해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있었다. 애초 집권여당과 갈등으로 불통 이미지가 강화된 박근혜 대통령을 염두에 둔 글이었다. 고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 시절 ‘청와대 내 야당’으로 통하며 군사정권의 독주를 탈색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헤어스타일과 한복 등 겉모습은 어머니를 재현하고 정치는 아버지를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생전에 어머니가 보여준 포용과 관용의 사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칼럼이란 한정된 지면에 최대한 압축해 쓰다보니 전말을 문의하는 독자가 생기게 됐다. 이에 지난 2004년 본보의 류금수 여사 인터뷰와 2008년 박만순 씨의 구술채록집을 토대로 내용을 재정리했다.

군사정권 대통령 영부인과 빨치산 여성전사는 일제하 1920년대 3년 터울로 태어났다. 유복한 부농의 집안에서 고등교육까지 마친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두 사람의 삶은 극과 극으로 갈라선다. 한쪽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좌에, 다른 쪽은 이름마저 감춘 시골 촌부로 변신했다. 도저히 맞닿을 수 없는 신분의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맺어진 과정을 다시 엮어본다.

▲ 배화여고 재학 시절의 고 육영수 여사(왼쪽)와 고교 시절의 고 류금수 여사.

1925년 충북 옥천읍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육영수 여사(1974년 작고)는 고향 초교를 마치고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1928년 충북 괴산읍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류금수 여사(2011년 작고)는 청주여고를 거쳐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 풍족한 집안을 배경으로 여성으로는 드물게 서울 유학까지 마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고교 졸업후 두 엘리트 여성이 택한 길은 크게 엇갈렸다.

청주여고 재학시 친일교사 퇴진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한 류 여사는 가까스로 이화여고에서 입학을 허용해 3개월을 다니고 졸업했다. 이때부터 사회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에 눈뜬 류씨는 48년 남노당 여성조직을 통해 월북해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했다. 얼마뒤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첫 접촉인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시 월남해 괴산, 청주에서 여성동맹 활동을 하다 검거돼 청주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두번째 감옥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게 된다.

부잣집 ‘교동 작은아씨’로 통한 육 여사는 옥천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여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친 육종관은 아들은 대학까지, 딸은 여고까지 졸업시킨다는 교육방침을 정해 육 여사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17세 때 옥천으로 돌아온다. 3년 뒤인 45년 해방을 맞아 옥천여중 교사로 부임했고 2km가 넘는 출근길을 항상 걸어다녔다는 것. 하지만 1년 6개월만에 사직서를 냈고, 그 배경에 대해 “실없는 말이나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 육 선생은 남자 선생님들의 실없는 말에 결단을 내려 교직을 떠났다”고 옥천군 생가복원 자료집에 적고 있다.

▲ 2005년 범민련 금강산 방문단에 참여한 고 류금수 여사(왼쪽에서 세 번째). (충북도여성발전센터 ‘충북여성인물사’ 전재)

한국전쟁으로 극명하게 갈린 삶

전쟁 직후 류 여사는 남노당 여성동맹 충북책임자로 활동한다. 하지만 몇 개월 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청주 인근 산으로 숨어 빨치산으로 변신했다. 결국 주민신고로 경찰에 붙잡히는 처지가 됐지만 요행히 탈출에 성공해 괴산 집에서 숨어지내게 된다. 반동좌익 색출에 위험을 느낀 할아버지는 손녀딸을 청상과부로 위장시켜 음성군 시골마을로 보낸다. 얼마 뒤 기혼자지만 자손이 없는 마을이장의 후처로 살림을 차리게 된다. 과거를 모두 숨기다보니 이름조차도 바꾸고 살 수밖에 없었다. 평소 아버지의 축첩을 대놓고 비판했던 자신이 운명의 장난처럼 그 덫에 걸리고 만 셈이다.

한국전쟁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기대했던 류 여사는 본처의 눈치속에 부엌일을 도맡아하는 새댁이 되고 말았다. 온갖 핍박에 속앓이를 하며 담배를 입에 댄 것이 평생을 끊지 못한 친구가 됐다. 다행히 류 여사는 3남 2녀(장남은 8세때 사망)를 낳아 대를 이었고 직접 행상에 나서 집안살림을 꾸리기도 했다. 서울을 오가며 도라지도 팔고 공산품을 떼다 팔기도 했다. 류 여사는 자신의 장사 경험을 통해 68년 마을 부녀회 자립사업을 주도하는 등 능력을 발휘한다.

육 여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갔고 친척의 소개로 육군 정보부 소속의 박정희 소령과 선을 보게됐다. 하지만 이미 한번 결혼해 자식까지 두고 이혼한 경력이 있는 박정희를 부친 육씨는 극구 반대했다. 심지어 50년 12월 대구에서 치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 한편 육 여사의 모친은 남편의 축첩에 반발해 옥천집을 나와 딸네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부친 육씨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생전에 3명의 소실을 두고 총 22명의 형제자매가 아흔아홉칸 한옥집에 함께 살았다. 박정희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낳은 육 여사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영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 생전에 음성 자택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한 류금수 여사(사진 오른쪽 두번째). (충북도여성발전센터 ‘충북여성인물사’ 전재)

‘부녀회 도와달라’ 편지 한 장의 위력

부친의 축첩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두 사람은 전쟁의 와중에 후처로 자리매김하는 공통의 운명을 겪게 된다. 한쪽은 남편의 승승장구로 하룻아침에 최고 권력자의 아내가 된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가정 안팎의 고통을 홀로 감수하는 모진 삶을 살게 된다. 충북의 농촌 도시에서 태어나 똑같이 서울 유학생활을 하고 정반대의 길로 18년을 살아온 두 여인. 이들의 삶이 맞닿을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1968년 두 사람이 40대에 접어들 즈음(육 여사 43세, 류 여사 40세) 소설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녀회 자립사업의 종자돈이 없어 고민하던 중 청와대에 도움을 청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결국 글을 배운 류씨가 청와대 육 여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시 2만원의 돈이 내려와 군에서조차 깜짝 놀랐다는 것. 고마운 심정으로 부녀회에서 엿을 고아서 감사편지와 함께 청와대로 다시 보내자 이번엔 육 여사의 답장으로 돌아왔다. 육 여사에게 인간적 신뢰감을 느낀 류씨는 자신의 비밀스런 개인사를 11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로 써서 보내게 된다.

“내가 개인적인 사정을 정말로 썼어. 내가 학교시절에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사실 그 죄로다가, 내가 20년간을 숨어서 산다. 이름도 성도 싹 바꾸고. 그런데 당신도 여자 나도 여자인데, 나를 용서해 줄 길이 있으면 용서를 하고, 벌을 줄려면 벌을 달라. 왜냐하면 이제는 애들이 다 내가 떠나도 자립해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이런 각오를 한 거다. 그래가지고 편지를 보냈어. 그랬더니 육 여사가 그거를 보고서 중앙정보부에 특명을 내린 거야.”<박만순 씨의 구술자료집 인용>

중앙정보부 과장, 음성까지 찾아와

얼마 뒤 우편배달부가 찾아와서 ‘면 우체국에서 누가 잠깐 나오란다”고 전갈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가보니 중앙정보부 과장이 편지를 내밀며 “육 여사님한테 보낸 게 맞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영부인으로부터 과거지사 모든 거를 다 용서해주고 주민등록증을 본인 이름으로 해주라는 특명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당시 그 직원은 승용차를 이용하면 남에 눈에 띌 수 있어 시내버스를 타고 음성군 삼성면까지 왔다는 것.

또한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어 주며 수일내로 서울로 찾아오라고 안내했다. 류 여사는 난생처음 남산 중앙정보부를 찾아갔고 그간의 행적에 대해 취조를 받았다. 조사관은 “20년동안 그늘에서 사느라고 참 고생 많이 하셨다. 본인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내시요”라고 위로했다. 중앙정보부를 나온 류 여사는 곧장 서울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엄마, 이제 내가 옛날의 류금수로 도로 돌아왔어. 엄마가 그냥 두손을 붙잡고 둘이 막 울었어. ‘니가 너무 똑똑해서 니 신세를 망쳤는데, 그래도 니가 너무 똑똑해 가지고 네 본이름을 찾았다니 다행이다’ 둘이 엉엉 울고, 68년도에 내 이름을 찾은 거야. 내 인생은 소설이여.”<박만순 씨의 구술자료집 인용>

▲ 고 류금수 여사 추모 조문객. (충북도여성발전센터 ‘충북여성인물사’ 전재)

분단역사 희생양 된 두 여인

반공방첩(?) 대통령의 부인이 빨치산 거물급(?) 여성전사에게 20년만에 자유로운 신분세탁을 해 준 것이다. 이후 류 여사는 당당하게 세상 한 가운데로 나섰고 평생 비전향 사회주의자로 강단있는 통일운동을 실천했다. 89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를 시작으로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활동했다. 2001년 범민련 남측본부 방북대표단으로 54년만에 다시 평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6.15민족공동위원회 충북본부 고문으로 후배를 지원하다 지난 2011년 음성 자택에서 작고했다. 올초 발간된 충북도여성발전센터의 ‘충북 여성인물사’에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생전에 류 여사와 육 여사만이 알고 있던 비밀은 지난 2008년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씨의 구술자료집 발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생전에 박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던 류 여사는 고 육 여사와의 인연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육 여사는 지난 74년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쏜 총탄에 맞고 운명했다. 육 여사 서거 소식을 듣고 류 여사는 서울로 올라가 먼 발치서 장례식을 보며 명복을 빌었다는 것. 한반도 분단 이데올로기의 서슬과 총탄에 희생된 된 두 여인이 그렇게 화해한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